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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박성경 + 백단비 - 낙법 연구(落法硏究)展>

- 북노마드 미술학교 a. school ‘art duo’

2015. 6. 12~6. 27
a. space(서울 용산구 이태원 2동 225-67 지하 1층)







절망의 나라에서 우리 힘으로 행복하기 - 미끄러지는 힘, 박성경+백단비 <낙법 연구> 전을 바라 보며

“자아의 기술은 개인들이 자신 스스로의 방법에 의해 영향 받는 것을 허락한다. 그들 스스로를 바꾸기 위해서, 특정한 행복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스스로의 신체와 영혼, 생각과 행위 그리고 존재 방식에 대한 특정한 작동들을 실행시키는 것이다.” - 미셸 푸코(안드레 레페키 지음, 문지윤 옮김,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 현실문화, 2014에서 재인용)

인간이 몸을 살리기 위해 먹을 것을 구하는 것처럼 작가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이미지나 상징을 어딘가에서 가지고 온다. 형상으로서의 작품을 이루는 ‘질료’를 찾는 일이 작가의 삶이다. 작가에게 비상하는 힘을 샘솟게 하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은 전시가 아니라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질료이다. 그것이 작가에게 비약을 꿈꾸게 하고 실제로 그런 에너지를 공급한다.

오늘날 많은 젊은 작가들이 작업의 질료를 ‘나(我)’와 또래 ‘세대’에게서 찾는 듯하다. 세대는 동시대의 문제들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미술하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이야깃거리다. 그런데 시절이 수상해서일까. 어린 생명들을 바다에서 꺼내지 못해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어른들 때문인 걸까. 본래 분노와 열정에 바탕을 둔 청춘 담론이 근자에 이르러 절망과 체념으로 전이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2011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2015년 한국에 소개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미술 버전으로 다가오는 박성경, 백단비의 <낙법 연구>전도 ‘달라진’ 세대론(論)을 실감케 한다. 그것은 어떤 의도와 목적을 품어서가 아니라 시대와 세상과 현실을 바라보는 젊은 작가들의 정직한 시선이라는 점에서 나와 같은 기성세대에게 어떤 스산함으로 다가온다. 위의 책을 쓴 일본의 후루이치 노리토시(古市憲壽)는 도쿄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전철에서 게임만 하고, 휴대전화에 몰두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면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아사히신문)는 일본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불만과 달리 ‘현재 생활에 만족한다’(책에 따르면 2010년 일본 내각부 조사에서 이십대 남성 65.9퍼센트, 이십대 여성 75.2퍼센트가 ‘현재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고도 성장기였던 1960년대 후반 이십대 젊은이의 생활 만족도는 60퍼센트, 1970년대에는 50퍼센트였다)는 젊은이들의 ‘진짜’ 현실에 주목한다. ‘잃어버린 20년’으로 상징되는 극심한 경제 불황과 ‘격차(格差) 사회’라는 말이 설명해주는 양극화에서도 ‘나는 행복하다’는 일본 젊은이들의 오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일하지도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니트(NEET)족, 평생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프리터(free arbeiter)족, 내향적이고 도전정신도 없는 초식남(草食男)에 이어 ‘사토리(得道) 세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중저가 브랜드 옷을 입어도 멋을 낼 수 있고,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울 수 있고, 무료 혹은 적은 비용으로 인터넷과 모바일로 소통할 수 있고, 아르바이트만 해도 정규직 못지않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고, 자신의 친구들도 가진 것이 없기에 질투도, 박탈감도 없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현실을, 미래를, 삶을 ‘달관’하기에 생겨난 단어의 조합이다. 경제 불황 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현재에 만족하는 젊은이들, 미래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사회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도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모순을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희망이 없기에 행복하다”로 정리한다.

희망이 없기에 행복하다는 청춘의 초상

일본의 이십대 사회학자가 밝혀낸 지금-여기의 ‘젊은이론’은 출간 후 15만 부를 돌파하고 일본 주요 언론이 일제히 문제작으로 삼을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이웃 나라 한국에서도 거의 동시대성으로 사유되고 있다. 근대 초기에는 ‘국민국가’라는 가상의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역군으로서, 세계대전과 경제 고도 성장기에는 병력과 노동력으로서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도화된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소비자로서 ‘기능’하는 젊은이론의 허위성을 드러낸 연구자의 논점은 유의미하다. 하지만 ‘사토리 세대’를 한국의 또래 세대들에게 직접적으로 이식하는 것으로 받아쓰기를 마치는 우리의 태도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달관 세대’라고 번역하여 일본과 한국의 청춘 세대를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는 기성세대, 특히 보수 언론의 보도 태도에는 어떤 정치적 저의마저 느껴진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보수적 정치․경제․사회 체제에 애써 저항하지 말고 ‘행복’이라는 이름의 자포자기를 선택할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듯하다. 물론 이 땅의 청춘들도 멀지 않은 때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득도’하여 현재를 달관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현실을 개척할 의지도 도전정신도 없다며 질타하는 기성세대를 향해 오로지 출세 경쟁만 하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며 걱정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와 명사(celebrity)의 말 한마디, 그것에 반응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관찰하고 발견하고 경험하여 얻어낸 우리만의 청춘론이 따로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이십대 중반의 두 젊은 작가(박성경, 백단비)가 또래 청춘들을 만나 대화하고, 그것을 미술적 모티프로 풀어낸 <낙법 연구> 전은 청춘 세대의 분노와 달관, 그 어딘가에 놓인 모호함까지, 삶의 진동이 느껴져 ‘다르게’ 다가온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여전히 미술을 모르고, 학교를 졸업하고 미술을 하겠다고 남았지만 그것이 옳은 선택인지 확실치 않고, 일정과 제목이 결정된 전시를 앞두었지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존재인지 모르는 불안의 파동이 솔직하게 전해진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참되고 신선하고 자연스럽다. 그들보다 좀더 많은 미술을 겪은 내가 찾고자 했던 ‘젊은’ 미술을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사랑을 질료 삼은 미술의 사건

두 작가는 북노마드 미술학교 a. school(에이스쿨)에서 서로를 처음 알았다. 가까운 곳에서 두 작가의 작업 과정과 전시를 지켜본 자로서 첨언하자면, 그들이 준비한 작업의 양은 전시 결과물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들에겐 분명 ‘잘’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야생의 상태에 가까운 젊은 미술을 보고 싶었다. 대변약눌(大辯若訥), 본래 최고의 언변은 마치 말을 더듬는 듯하다고 했다. 매끄럽게 ‘잘’ 만든 전시를 내놓고자 하는, 인정받고 싶은 욕심을 저어하는 것이 옆에서 지켜보는 어른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학생들과 젊은 작가들은 너무 많은 것을 보아서 문제다. 그 본 것을 내 것이라고 여겨서 더 큰 문제다. 그래서 내가 보고 듣고 겪고 배우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들었다고 겪었다고 배웠다고 오인한다. 자기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때때로 유용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지금 그것이 정녕 너의 것이냐고. 나 또한 그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해성사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와 그들이 무언가를 알려고 하지 않고 ‘공감(sympathy)’하는 것, 그것이 이 사회에 남은 마지막 소통의 통로라고 믿고 싶었다. 다행히 두 작가는 또래 세대들을 공감하는 ‘사랑’을 질료 삼아, 그들의 삶을 ‘낙법(落法)’과 ‘춤’이라는,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발랄한 형상과 형태와 형식으로 압축시켰다. 그것은 두 사람에게 ‘사건’이었다. 서로의 감각과 정서와 생각을 하나로 조율하는 어려운 과정을 겪었다는 것, 자기를 넘어 타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 그 과정을 모르는 이가 흥미롭게 공감할 수 있도록 공통의 모티프를 찾았다는 것, 상상에 그칠 수 있는 것을 전시라는 ‘실체’로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 사건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불쑥 솟아난 ‘다른’ 작가와 더불어 하나의 전시를 만들어냈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삶 속에서 불쑥 솟아난 타자와 더불어 삶을 재발명하고 세계를 재구성하는 흔치 않은 체험이다. 두 작가의 ‘사랑’이, 전시의 질료를 이루는 이십여 명 청춘들의 육성의 고백이 절절한 까닭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좀더 ‘자유’해도 좋다. 그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을 즐기는 사회의 체계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상황’을 만들었다는 자존감을 가져도 좋다.

‘몸’의 움직임의 정치학

전시는 영상과 드로잉, 오브제, 매뉴얼 북(manual book)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상은 두 작가가 전시를 준비하며 배운 ‘유도’ 동작과 청춘들과의 ‘인터뷰’ 그리고 그들이 현실에서의 추락을 감내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인터뷰와 동작은 매뉴얼 북에 글과 그림으로도 실렸다). 구멍투성이인 세상, 그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 선택한 몰락. 전시는 넘어지거나 떨어질 때 안전하게 몸을 유지하는 법을 넘어 ‘미끄러지는 힘’으로서의 ‘낙법’을 ‘몸’으로 그려낸다. 그것은 하나의 ‘운동적인(kinetic)’ 영상미로 다가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물론 두 작가는 안무가도 무용가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몸을 움직인다는 것이 단순히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주체성, 정치성과 움직임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는 것임을 아는 듯하다. 청춘의 실존적 고백을 입구 삼고, 그것을 극복하는 어떤 움직임을 출구로 채택한 그들의 안무적 실험은 운동성의 정치학이라는 의미를 자아낸다.

근래 들어 그 만남이 잦아지고 있는 미술과 무용의 접점에 예술가의 ‘몸’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내러티브에 매여 있는 무대 연출과 인상적인 포즈에의 집착 그리고 음악에 종속된 몸짓을 넘어 움직임의 ‘수축’에 기초한 실험적 안무가 춤의 개념을 해체하는 근래의 양상은 그것이 미술의 퍼포먼스와 멀지 않음을 보여준다. “몸은 힘에의 의지가 발산되는 현장”이라고 말했던 니체를 원점으로 삼아 철학은, 미술은, 무용은 몸에 대한 철학과 몸에 대한 정치적 재구성으로 스스로를 풀어헤치고 있다. 그 결과 주체라는 견고했던 개념은 ‘주체성’으로 이행하고 있다. 근대성이 ‘생각’하는 것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면, 그 이후는 ‘감각’하는 몸의 개념을 통해 주체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면, 이제는 몸짓을 통해 ‘주체성’을 고민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유도의 낙법과 삶의 고백으로서의 인터뷰 그리고 현실의 중력을 견디는 동작으로 종결되는 <낙법 연구> 전의 ‘몸짓’은 기성세대가 강요한 주체의 개념을 거부하고 개인들이 스스로의 방법으로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가는 자아의 기술(푸코)일 것이다. 그것은 자기중심적 경험에 빠지고 마는 근대적 주체성이 아니라 “열려 있고, 역동적인 교환 시스템으로서 끊임없이 주체화와 통제의 방식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저항과 ‘되기(becoming)'의 방식도 동시에 생산하는”(안드레 레페키 지음, 문지윤 옮김,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 20~21쪽, 2014)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그들’만의 주체성일 것이다.

삶을 발명하고 재발명하는 가능성의 몸짓

전시는 늘 ‘다음’이라는 숙제를 부과한다. 다음의 작업, 다음의 전시. 알랭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작가는 ‘충실성’이라는 숙제를 감당해야 한다. 충실성은 사건을 생각하고 그로 인해 변화를 경험한 사건의 ‘주체’에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다. 사건의 파괴적 결과들에 스스로를 헌신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이번 전시에서 만들어낸 사건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미술을 공부하던 학생에서 작가가 되었다는 사건, 기성세대가 규정한 주체와 동일시되지 않는 존재 방식을 고민하기로 결심한 사건, 그 주체성을 통해 삶을 지속적으로 발명하고 재발명하는 가능성을 찾아 나서기로 결정한 사건에 의지해야 한다. 사건은 절대적이지도, 고정적이지도 않다. 사건의 의미는 열려 있고 살아 있다. 사건의 진실은 ‘포괄적이며’ 혹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다음에 어떤 작업으로, 어떤 전시로 찾아올지 자신조차 모르는 이유이다. 그래서 어쩌면 두 사람의 다음 행보는 더욱 힘들 것이다. 결국 해답은 ‘사랑’이다. 사랑은 행동이다. 우리는 사랑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타자를 연민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눈앞의 타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하고 스스로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바디우는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나도 두 작가가 사랑만큼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 한다. 사랑은, 미술은 삶을 재발명하고 세계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생각하고 감각하는 것을 넘어 연민하고 공감하고 애도할 수 있다. 그 진실한 사랑이, 그 사랑의 미술이 우리를 참된 존재로 만든다. 사랑을 포기하면 삶은 무미건조해진다. 사랑을 포기하면 미술은 무의미해진다. 미술이 우리에게 주요한 사건이 되는 이유다. 스펙터클하게 쏟아져 우리를 중독시키는 자본주의적 이미지, 재미를 중시하는 대중문화의 스토리텔링, 주체를 망각한 채 자기애에 빠지게 하는 관습적인 사랑과 자기중심주의…… 우리로 하여금 주체성을 망각하게 하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지금, 우리가 매달려야 할 것은 사랑으로서의 예술이다. 그것이 비록 얻기 힘들지라도, 오랜 인내를 요구할지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어떤 폭풍우에도 꺾이지 않는 마음의 힘

시인 정현종은 ‘빛’이라는 말이 발음되거나 내걸리면 그 소리와 단어는 즉시 그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듯하고, ‘꽃’이라는 말이 발음되거나 내걸리면 즉시 향내가 나는 듯하다는 비유를 들며 ‘실물’에 가까운 말들이 있다고 적고 있다. 『두터운 삶을 향하여』라는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빛은 워낙 밝은 것이고 꽃은 워낙 아름다운 것이어서, 그것들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워낙 선명히 각인된 것이어서, 그 말들이 환기하는 것 이외의 것은 전혀 틈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리라. 나는 박성경과 백단비, 두 작가가 보고 듣고 겪은 또래 세대들의 이야기에서 ‘청춘’의 ‘실물’을 매만질 수 있었다. SNS와 미디어를 통해 신물 나게 들은 청춘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싶은지 알고 싶다’는 청춘의 고통과 순정이 오롯이 전해진 까닭일 것이다. 그들에게 삶이란 아주 아주 아득히 먼 곳을 보는 것처럼, 다른 세상을 보는 것처럼 막연해 보였지만, 나는 그 막막함 속에서 ‘꿈’이라는 이름의 한 가닥 빛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 눈이 부시게 푸르렀다. 본래 삶이란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내가 고독한 것이고, 그 옆의 누군가도 고독한 것이다. 나도 고독하지만 너도 고독하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는 순간, 그 ‘서러운’ 고독이 우리의 작은 기억들을 알아주는 것이다. 그 고독한 누군가를 만나기로 결심한, 그 고독한 목소리를 경청한, 그 서러운 고독을 껴안은 두 젊은 작가들이, 그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고백한 청춘들이 이것만은 알았으면 좋겠다. 세상이 ‘아니오’라고 말하는 때로부터 삶은 새롭게 출발한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더 살아야 한다는 것을.

참으로 힘든 시대다. 『마음의 힘』의 저자 강상중 교수는 “외견상 활기를 띠고 있어도 내면적으로는 희망도 전망도 없는” 시대가 찾아왔다고 토마스 만의 말을 빌린다. 희망도 전망도 없는 시대, 그러한 시대를 만든 기성세대를 향해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인정받으려 노력해야 하는 시대, 급기야 불행한 시대에 행복해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 청춘을 바라보아야 하는 시대. 이런 우울한 시대에 강상중은 “어떤 폭풍에도 꺾이지 않는 한 줄기 갈대와도 같은 ‘마음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바디우에게 사랑과 충실성이 있다면, 강상중에게는 마음이 있다. 우리는 마음을 통해서만 이 시대를 직시할 수 있다. 두 작가가 하나의 전시를 끝냈다고 해서 일상과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미술은 본래 지식을 알려주지도, 삶을 성공에 이르게 하는 비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니 당연하다. 다만 미술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지식을 알려주지 않지만,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는지 큰 그림을 보여줄 수 있다. 그것을 가리켜 강상중은 사회와 현실의 도그마나 이념을 믿지 말고 ‘평범’을 기준 삼아 자기 앞에 주어진 ‘길[道]’을 선택하라는 문장으로 맺고 있다.

박성경, 백단비가 만난 이십 여 명의 청춘들은 스스로 몸을 ‘움직여’ 경쟁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이 시대에 맞춰진 주체의 껍질을 벗겨내기로 했다. 강렬한, 그러나 실용적인 목적을 품지 않은 그들의 형태 없는 움직임은 세상이 억지로 만들어낸 이상적인 몸을 해체시키는 아름다운 몸짓이었다. 그들 각자의 몸은 약하고 볼품없지만, 그들이 몸으로 느끼는 아픔만큼 그들이 꿈꾸는 세계는 구체적이다. 그들의 몸이 매트에 미끄러지며 단련되고, 나의 아픔을 세계의 아픔으로 애도하는 ‘관계적 신체’(안드레 레페키)로 교체될 때, 우리는 그들의 삶이 정지(stop)된 것이 아니라 아직 열리지 않은 ‘일단 멈춤(pause)’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인용하고 있는 청춘의 ‘담론’을 믿기로 했다. 이제 오래지 않아, 사회적 구조와 어른들에 의해 봉인된 ‘일단 멈춤’이 해제되는 순간, 그들은 어디론가 힘차게 탈주해나갈 것이다. 그들은 시대가 강요한 고식적인 청춘의 정체성에 순응하지 않고 끊임없는 해체를 갈구하는 생성(being)의 정체성으로 변화할 것이다. 그 끊임없는 해체와 그로부터 새롭게 만들어지는 ‘관계의 조직’(신영복)을 엮어나갈 그들의 ‘다음’이 기다려진다. 그 관계성은 세상이 지키려 하는 수직과 세상이 그들에게 원하는 수평의 만남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사선(斜線)’일 것이다. 우리의 청춘은 그 미끄러지는 힘으로 세상 밖으로 나갈 것이고, 세상 너머로 자신을 연결시킬 것이다. 오로지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내 ‘소유’의 관점으로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저 지긋지긋한 어른들의 추악한 존재론을 거부하고 자기를 열어 다른 것과의 사이[間]를 고민하는 존재-역사가 될 것이다. 그 무엇이 되려 하는 청춘들에게 이 말을 남기려 한다. 고맙다고, 아직 버티어 주어서, 아직 살아 있어주어서.

글. 윤동희(북노마드 대표)


박성경 백단비_요란한 순응_단채널 비디오_1분 45초_전시장 전경_2015


박성경 백단비_사사로운 물의: 춤_다채널 비디오_9분 15초_2015


박성경 백단비_사사로운 물의: 춤_다채널 비디오_9분 15초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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