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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毒 과 도道
울자, 때로는 너와 우리를 위해

서평의 고수 ‘파란 여우’가 보내는 인문 공감 에세이 아픈 마음은 지향하는 마음이다. ‘누군가의 상처’인 나와 너를 위한 위로
 

 

 

 

 

 

   

- 윤미화 지음
- 147*224
- 332쪽
- 16.000원
- 2012년 6월 22일
- 978-89-97835-01-0 (03810)
- 031.955.2675(편집) 031.955.1935(마케팅)

         
 

서평의 고수 ‘파란 여우’가 보내는 인문 공감 에세이

모두가 힘겨운 시대다. 사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 지경에 이른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무시로 이렇게 토로하곤 한다. 우리는 지금, 정말 잘살고 있는 것일까? 서평의 고수 ‘파란 여우’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세상의 모든 ‘독’의 근원을 찾기 위해 한미FTA, 광우병, 4대강, 삼성, 왕따, 교육, 환경, 동물, 공정무역, 예술, 사랑, 결혼 등 깊고도 넓은 독서를 몸소 실천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독이 든 자본주의의 삶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의식을 향해 쓴소리를 뱉어야 한다는 것을, 자본주의라는 틀을 바꿀 수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가져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를 통해 ‘공동체’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란 여우’의 새 책 『독(毒)과 도(道)』는 ‘우리, 이대로 정말 괜찮은가?’라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절망을 통해 역설적으로 희망을 찾고자 한다. 모두가,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자본주의의 톱니바퀴에 절망의 원인이 있고, 그 자본주의의 획책에서 벗어나 제대로 살고자 하는 ‘행위’에 희망의 동인이 있음을 말하려 한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세상이 바뀌어도 삶의 근간을 이루는 것들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책. 『독과 도』는 지금, 여기 나와 너와 우리를 향한 따끔한 위로이다.

 




출판사 서평


자본주의가 안겨준 마음속의 독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

서평계의 고수, 파란여우가 돌아왔다. 첫번째 책 『깐깐한 독서본능』에서 조곤조곤, 그러나 다부지게 ‘할 말’은 하던 윤미화가 이번에는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호소하는 현대인을 위한 약을 들고 찾아왔다. 일단 약을 먹기 전에 그녀가 쓴 처방전을 살펴보니 이번에도 따끔하다. 자세히 읽어보면 그 안에 위로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세상의 병들의 원인을 찾기 위해 한미FTA, 광우병, 4대강, 삼성, 왕따, 교육, 환경, 동물의 생존권, 공정무역, 예술, 사랑, 결혼 등의 열쇠말의 범위 역시 깊고도 넓다.

그렇다면 왜 독과 도일까. 저자는 자본주의의 톱니바퀴를 견디느라 켜켜이 쌓인 마음의 상처를 ‘독’이라 정의한다. 안타깝게도, 아니 허무하게도 현대인의 삶 구석구석 처박힌 독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방법은 하나. 욕망을 욕망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를 패착에 이르게 하는 자본주의를 즐기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쌓인 ‘독’을 덜어내는 ‘길(道)’밖에 없다. 나 혼자가 아닌, 타자와 우리라는 공동체를 보는 길, 세계가 끊임없이 변해도 우리가 묵묵히 걸어가는 저 길의 끝에는 여전히 ‘희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저자는 말한다.

저자가 도시에서의 삶을 스스로 접고, 시골로 낙향해 책을 읽고 책에 관한 글을 쓰며 살아간 지도 수년이 되어 간다. 어쩌다 가끔 일이 생겨 서울을 가노라면 예전에 다닌 길이 낯설 정도다. 저자가 시골에서 염소를 키우며 책을 읽는 사이, 서울은 더 거대해졌다. 늦은 밤 지하철에는 마네킹처럼 생기 없는 ‘지하철 나그네’들이 잠을 자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책 읽는 사람은 물론이요 ‘사람을 보는 사람’이 사라졌다. 그때마다 저자는 목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묻고 싶었다고 한다. “사는 게 쉽지 않아요, 그죠? 나만 중심 잡고 살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죠? 왜일까요? 그래요, 우리는 제도에 구속되었답니다. 행복을 얻으려면 더 빨리 달려서 더 많은 돈을 벌라고 부추기는 국가와 자본이라는 제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거예요. 이러한 세상의 굴레 속에서 누군가의 상처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셨어요? 도대체 인간이란 어떻게 생겨먹은 존재인지를 한 번이라도 고민해 보셨어요?”

서평의 고수 ‘파란 여우’가 건네는 따끔한 위로

출산비용이 없어 성매매를 하다 적발된 만삭의 여인, 고공행진을 멈추지 않는 등록금에 신음하는 대학생, 결혼비용이 없어 헤어지는 슬픈 연인, 정리해고로 실직한 뒤 투쟁에 지쳐 아파트 23층에서 뛰어내린 쌍용자동차 노동자, 명문대 입학 강요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어머니를 살해한 아들……. 저자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조여 오는 마음의 독이 이처럼 어마어마한 삶의 비극을 잉태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들이 한때 무릎을 맞대고 앉아 따순 밥을 먹던 사람들임을 안타까워한다. 이러한 비통하고 절박한 세상 속에서 책을 붙들고 있는 게 무슨 소용 있나 무기력에 빠질 때도 많았다고 토로한다. 생각해보라. 소용돌이치는 만경창파 같은 세상에서 책 따위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비정규직과 한미FTA와 백만 명 청년실업과 자살률 증가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부서진 뗏목’을 타고 ‘화폐지상주의 급류’에 휩쓸려가는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우울했다는 저자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자. 산을 좋아하던 친구는 산에 가지 않고, 시인이 되겠다는 친구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고, 그림을 그리던 친구는 급식 도우미가 되어 생계를 꾸리고, 작곡가를 꿈꾸던 친구는 회사원이 되고, 축구선수가 되고 싶던 친구는 일용직 건설노동자가 되고, 만화가가 되겠다던 친구는 택시를 몰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는 겨우 살 만하고 또 누군가는 어렵기 만한 세상. 우리가 한때 오롯이 지녔던 꿈이 날 선 현실에 긁히고 찢어져서 영영 손쓸 수 없이 마모된 것 같은 세상 속에서 저자는 ‘공동체’라는 화두에 천착한다. 현대인에게 ‘공동체’는 존재하는가, 오늘날의 공동체는 어디에서 와서 어느 곳을 향해 가는가, “우리, 이대로 정말 괜찮은가?” 하는 공동체에 대한 절망을 통해 역설적으로 희망을 찾고자 한다. 이유는 하나. ‘제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에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기 위함이었다.

『독과 도』는 지금, 여기 나와 너와 우리를 향한 따끔한 위로를 담은 책이다. 세상에 꿈과 사랑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시켜주는 고마운 책이다. 살면서 날개가 부러진 새들, 살면서 쓰러진 나무들, 살면서 넘어진 사람들, 살면서 허기진 영혼들에게 단 하루라도 사랑의 안식일이 주어졌으면 하는 따뜻한 마음, SNS에서 화려한 수다로 하루를 연명하지만 공허함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손에 들고 아직 만나지 못한 세계를 낚았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마음이 담긴 책이기도 하다. 억압과 차별과 편견과 서러움의 능선을 넘느라 아프고 외로운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었다는 저자의 고백이 진솔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독이 든 자본주의의 삶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의식을 향한 쓴소리, 자본주의라는 틀을 바꿀 수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을 가져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 우리가 ‘공동체’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이유를 담기 위해 자신의 독서 인생의 정수를 담은 이 책이 우리의 남은 삶을 이끌어주는 소중한 지침서로 남을 거라는 확신은 여기에서 나온다. 나와 너와 우리를 향한 위로, 그것이 독과 도다.

 



본문 중에서


지(知)는 안다는 것, 알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깨닫는다는 의미다. 깨달음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다. 제대로 된 인식은 각성(覺性)이다. 강상중의 지성에 대한 열망은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표명하고 일본 사회로 진출할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다. 결국, 행동은 지성의 열매가 아닌가.

비정규직은 폭주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팽창 속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이다. 어차피 자본주의를 버릴 수 없다면 기업은 돈 버는 고민과 함께 사람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경제는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 우샤인 볼트처럼 달려왔다. 그래서 굶기를 겨우 면한 지금 이 사회는 늦게나마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이냐고 몸부림치며 묻고 있는 것이다. 약자에 대한 약탈과 배제로 얻는 자본의 오만함에 분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 여성노동자』는 ‘사람앓이’ 없는 자본의 오만방자함을 온몸으로 말하는 책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나는 있었다, 나는 있다, 나는 있으리라!”

한미FTA 협의문에서 ISD 개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 출신의 글로벌 투자자들이 한국을 상대하는 소송제도를 유연하게 정리하면 과연 평등한 거래관계가 형성될까. 이미 미국식 거대자본이라는 각성제를 주사 맞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빈약한 한국 경제 구조가 자립할 수 있을까. 있다면 무엇을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며, 시기는 어느 정도 걸릴까. 한국 경제는 미국 외에는 대안이 없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글로벌 자본가와 컨테이너 박스 사무실을 가진 영세자영업자의 거래는 영세 자영업자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갖고 있던 창업자금조차 이자로 내고 나면 컨테이너는 ‘투자자의 쓰레기통’으로 전락한다.

이리떼처럼 사나워진 아이들이 무서워 교사하기 두렵다는 말이 나온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학교는 더이상 학문을 배우는 곳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는 없고 돈과 폭력이 학교를 뒷골목처럼 만들었다. 아이들은 웃음을 잃고 행복을 모른다. 만약, 선생과 제자가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면 학교는 일요일에도 가고 싶은 곳이 된다. 노는 일은 즐겁기 때문이다. 그리스 아카데미 학당처럼 학교 동산에 모여 철학을 논하고 담론을 나누는 수업은 사유의 힘을 키운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짐승의 눈동자로 사제 간에 주먹을 휘두르진 않을 것이다. 입시 경쟁에 치여 스승이 사라진 시대라고 한다. 스승은 어디로 갔나요?

예수가 마시고 먹으며 담론을 나누고 놀았던 ‘길거리 무대’와 자발적 교감과 엑스터시를 반복 강조하는 저자는 ‘소통’을 축제의 핵심으로 여긴 듯하다. 책의 결미에서 마침내 강의 흐름을 허하라는 메시지가 등장한다. 강가에서 문명을 만든 인류가 강에게 감사의 제를 올리다가 언제부터인지 강을 착취하고 있다. 저자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책 출간시기가 4대강 사업 시행 시기와 묘하게 일치한다. 강은 흐르는 존재다. 흔히 역사를 강의 흐름에 비유한다. 강은 고정화되지 않은 것, 막힘이 없는 것, 계속 진행하는 것, 주변을 적시며 생명을 키우는 것을 상징한다. 축제가 영성의 해방이라면 흐르는 강은 해방을 기약하는 상징이다. 그래서 축제는 자발적이자 ‘소통하는 굿판’인 것이다.

나는 보편성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보편성에는 먹고살 만한 사람들, 또는 그 비슷한 계층에 근접해 노력하는 사람들, 일정수준 학력과 문화수준을 누리는 사람들, 친척이 모였을 때 안정적인 직장과 직업으로 칭찬을 받는 사람들, 복지와 정치에 관심이 많지만 정작 이웃에겐 관심이 없는 사람들, 명성과 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하지만 성공한 사회지도자를 부러워하고 좇는 사람들, 성소수자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편견 없이 대하는 것 같지만 친구로는 거부하는 사람들, 불의를 보고 흥분하지만 공공의 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공권력 행사를 기대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우리의 선량하고 보편적인 이웃 아닌가. 길에서 만나면 상냥한 인사를 나누고 인정이 많은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사람 말이다. 좋은 게 좋은 거고 다수결에 따르는 일이 편하다는 사람들. 일반적 상식을 회의하고 거부하는 사람은 낙오자인가. 대승적 견지에 동조하지 않으면 불온한가. 각자 고유의 개체적 특징을 평균에 속하도록 강제하는 의미로 희석시키는 말이 보편성은 아닐까.

사회는 일개미처럼 일할 것을 강요하고 기업은 자본을 종교처럼 여긴다. 또한 알게 모르게 종속되어 멍에를 지고 사는 사람들, 돈을 벌지 못하면, 부자가 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사람들. 누가 이들에게 돈을 신처럼 받들라고 했을까. 누가 욕망을 욕망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욕망을 패착하게 만든 것일까. 결국 나라는 존재는 돈이 만든 존재이며 돈이 나를 보장하며 돈이 없으면 사회 구성원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일까. 돈이 종교적 갈구가 된 사회에서 돈만 나쁜가. 돈만 죽일 놈인가. 돈만 죽어도 마땅한 놈인가. 그러면 돈은 누가 버나. 아니 돈 없이 어찌 살라고 그런 소리를. 돈을 구조화한 사회에서 돈이 모든 논리를 정복해서 종교가 되고, 돈이 종족보존을 하는 세계에서 돈은 억울하다. 앙드레 고르는 『에콜로지카』에서 돈을 좇으며 소비 욕구를 억누르지 못해 자본에 노동을 헌정하는 노동자를 향해 ‘돈 벌기의 공범’이라고 비판한다.

도시에서 살든 언덕 위 별장에서 살든 ‘작은 규모의 삶’은 가능하다. 쓰고 버리는 삶을 지양하겠다는 계획만 세워도 절반은 존재지향적 의미를 달성했다고 본다. 한 번 생긴 물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니어링 부부처럼 숲으로 들어가 노동을 할 수 없다면 아파트에서도 소비문제를 고민할 수 있다. 가난이 두렵지만 돈을 가질 수 없다면 돈을 버리는 삶도 그렇게 나쁘진 않다. 니어링 부부의 잔소리에 유혹당해, 혹은 소로우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훈계에 넘어가서, 곰배령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부러워서 시골살이를 동경한다면 많이 고민하시라. 스코트도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을 남겼다. 고민은 이미 당신 마음이 존재지향에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다.

눈을 맞추고 마음을 맞춘 공감은 그믐밤을 밝히는 한 개의 촛불처럼 온화하다. 그렇게 눈을 맞추면 나에게도 마음을 맞춰주는 축복이 찾아올 것을 믿으란다. 정혜신은 “당신의 멘토는 당신 자신”이라고 알려준다. 사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줄도 모른다. 나를 사랑하고 살뜰히 아끼는 일이 필요할 만큼 세상은 충분히 서먹하고 외롭다. 아낌없이 사랑을 할 때 백만 송이 꽃이 핀다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꽃은 주변을 환하게 하고 향기를 전한다. 꽃은 사랑의 힘을 지니고 있다. 자신을 가꾸면 자신의 꽃을 피울 뿐만 아니라 타인의 꽃을 피우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차례

들어가며

1부 우리 이대로 괜찮은가요?

자이니치 오디세이
쓸데없는 딸들, 역사를 쓰다
예쁜 여자, 누가 만드나
꼼수 FTA
스승은 어디로 갔나요
성적에 목숨 거는 대학
세계를 움직이는 골드핑거
축제를 기다리며
경제성장에 묻힌 진실
무산자의 항거
염소에게 자유를 묻다
삽질 한국에서 읽는 탈성장론

2부 존재한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

그 순간, 그 종은 사라졌다
당신 안의 설탕을 끓여내세요
세계화와 바이러스 섹스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낮은 태도, 작은 규모, 적은 소유
관계와 순환의 밥상
소는 누가 키우나
아름다움의 힘
새들은 어디로 사라졌나
니어링 부부의 존재지향적 삶
그물코 지구
호랑이를 향한 오마주

3부 아픈 마음은 지향하는 마음이다.

쑤퉁의 문학
사람을 찍는다는 것은 사랑을 찍는 것
세상을 여행하는 붉은 소파
내 안에 괴물이 있다
너는 사랑이라 부르고 나는 공감이라 부르는 것
고마코 양 보세요
당신은 향기로운 꽃이에요
당신의 여행가방에 담긴 책
이언진을 만나다
쥘 미슐레의 여자이야기
타자와의 만남

 




지은이

윤미화

1964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삼성전자를 거쳐 공무원 생활을 끝으로 40대 이후 일체의 사회생활을 정리하고 촌구석에서 살고 있다. 비 오는 날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고 책을 읽다 잠드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경향신문과 각종 잡지에 글을 기고하며 염소를 친다. 쓴 책으로 서평 에세이 『깐깐한 독서본능』이 있다.
@chonf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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