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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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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미화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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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의 고수 ‘파란 여우’가 보내는 인문 공감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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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안겨준 마음속의 독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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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지(知)는 안다는 것, 알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깨닫는다는 의미다. 깨달음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다. 제대로 된 인식은 각성(覺性)이다. 강상중의 지성에 대한 열망은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표명하고 일본 사회로 진출할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다. 결국, 행동은 지성의 열매가 아닌가.
비정규직은 폭주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팽창 속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이다. 어차피 자본주의를 버릴 수 없다면 기업은 돈 버는 고민과 함께 사람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경제는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 우샤인 볼트처럼 달려왔다. 그래서 굶기를 겨우 면한 지금 이 사회는 늦게나마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이냐고 몸부림치며 묻고 있는 것이다. 약자에 대한 약탈과 배제로 얻는 자본의 오만함에 분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 여성노동자』는 ‘사람앓이’ 없는 자본의 오만방자함을 온몸으로 말하는 책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나는 있었다, 나는 있다, 나는 있으리라!” 한미FTA 협의문에서 ISD 개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 출신의 글로벌 투자자들이 한국을 상대하는 소송제도를 유연하게 정리하면 과연 평등한 거래관계가 형성될까. 이미 미국식 거대자본이라는 각성제를 주사 맞은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빈약한 한국 경제 구조가 자립할 수 있을까. 있다면 무엇을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며, 시기는 어느 정도 걸릴까. 한국 경제는 미국 외에는 대안이 없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글로벌 자본가와 컨테이너 박스 사무실을 가진 영세자영업자의 거래는 영세 자영업자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갖고 있던 창업자금조차 이자로 내고 나면 컨테이너는 ‘투자자의 쓰레기통’으로 전락한다. 이리떼처럼 사나워진 아이들이 무서워 교사하기 두렵다는 말이 나온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학교는 더이상 학문을 배우는 곳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는 없고 돈과 폭력이 학교를 뒷골목처럼 만들었다. 아이들은 웃음을 잃고 행복을 모른다. 만약, 선생과 제자가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면 학교는 일요일에도 가고 싶은 곳이 된다. 노는 일은 즐겁기 때문이다. 그리스 아카데미 학당처럼 학교 동산에 모여 철학을 논하고 담론을 나누는 수업은 사유의 힘을 키운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짐승의 눈동자로 사제 간에 주먹을 휘두르진 않을 것이다. 입시 경쟁에 치여 스승이 사라진 시대라고 한다. 스승은 어디로 갔나요? 예수가 마시고 먹으며 담론을 나누고 놀았던 ‘길거리 무대’와 자발적 교감과 엑스터시를 반복 강조하는 저자는 ‘소통’을 축제의 핵심으로 여긴 듯하다. 책의 결미에서 마침내 강의 흐름을 허하라는 메시지가 등장한다. 강가에서 문명을 만든 인류가 강에게 감사의 제를 올리다가 언제부터인지 강을 착취하고 있다. 저자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책 출간시기가 4대강 사업 시행 시기와 묘하게 일치한다. 강은 흐르는 존재다. 흔히 역사를 강의 흐름에 비유한다. 강은 고정화되지 않은 것, 막힘이 없는 것, 계속 진행하는 것, 주변을 적시며 생명을 키우는 것을 상징한다. 축제가 영성의 해방이라면 흐르는 강은 해방을 기약하는 상징이다. 그래서 축제는 자발적이자 ‘소통하는 굿판’인 것이다. 나는 보편성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보편성에는 먹고살 만한 사람들, 또는 그 비슷한 계층에 근접해 노력하는 사람들, 일정수준 학력과 문화수준을 누리는 사람들, 친척이 모였을 때 안정적인 직장과 직업으로 칭찬을 받는 사람들, 복지와 정치에 관심이 많지만 정작 이웃에겐 관심이 없는 사람들, 명성과 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하지만 성공한 사회지도자를 부러워하고 좇는 사람들, 성소수자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편견 없이 대하는 것 같지만 친구로는 거부하는 사람들, 불의를 보고 흥분하지만 공공의 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공권력 행사를 기대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우리의 선량하고 보편적인 이웃 아닌가. 길에서 만나면 상냥한 인사를 나누고 인정이 많은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사람 말이다. 좋은 게 좋은 거고 다수결에 따르는 일이 편하다는 사람들. 일반적 상식을 회의하고 거부하는 사람은 낙오자인가. 대승적 견지에 동조하지 않으면 불온한가. 각자 고유의 개체적 특징을 평균에 속하도록 강제하는 의미로 희석시키는 말이 보편성은 아닐까. 사회는 일개미처럼 일할 것을 강요하고 기업은 자본을 종교처럼 여긴다. 또한 알게 모르게 종속되어 멍에를 지고 사는 사람들, 돈을 벌지 못하면, 부자가 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사람들. 누가 이들에게 돈을 신처럼 받들라고 했을까. 누가 욕망을 욕망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욕망을 패착하게 만든 것일까. 결국 나라는 존재는 돈이 만든 존재이며 돈이 나를 보장하며 돈이 없으면 사회 구성원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일까. 돈이 종교적 갈구가 된 사회에서 돈만 나쁜가. 돈만 죽일 놈인가. 돈만 죽어도 마땅한 놈인가. 그러면 돈은 누가 버나. 아니 돈 없이 어찌 살라고 그런 소리를. 돈을 구조화한 사회에서 돈이 모든 논리를 정복해서 종교가 되고, 돈이 종족보존을 하는 세계에서 돈은 억울하다. 앙드레 고르는 『에콜로지카』에서 돈을 좇으며 소비 욕구를 억누르지 못해 자본에 노동을 헌정하는 노동자를 향해 ‘돈 벌기의 공범’이라고 비판한다. 도시에서 살든 언덕 위 별장에서 살든 ‘작은 규모의 삶’은 가능하다. 쓰고 버리는 삶을 지양하겠다는 계획만 세워도 절반은 존재지향적 의미를 달성했다고 본다. 한 번 생긴 물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니어링 부부처럼 숲으로 들어가 노동을 할 수 없다면 아파트에서도 소비문제를 고민할 수 있다. 가난이 두렵지만 돈을 가질 수 없다면 돈을 버리는 삶도 그렇게 나쁘진 않다. 니어링 부부의 잔소리에 유혹당해, 혹은 소로우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훈계에 넘어가서, 곰배령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부러워서 시골살이를 동경한다면 많이 고민하시라. 스코트도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을 남겼다. 고민은 이미 당신 마음이 존재지향에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다. 눈을 맞추고 마음을 맞춘 공감은 그믐밤을 밝히는 한 개의 촛불처럼 온화하다. 그렇게 눈을 맞추면 나에게도 마음을 맞춰주는 축복이 찾아올 것을 믿으란다. 정혜신은 “당신의 멘토는 당신 자신”이라고 알려준다. 사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줄도 모른다. 나를 사랑하고 살뜰히 아끼는 일이 필요할 만큼 세상은 충분히 서먹하고 외롭다. 아낌없이 사랑을 할 때 백만 송이 꽃이 핀다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꽃은 주변을 환하게 하고 향기를 전한다. 꽃은 사랑의 힘을 지니고 있다. 자신을 가꾸면 자신의 꽃을 피울 뿐만 아니라 타인의 꽃을 피우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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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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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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