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조금은 낯선, 그러나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곳,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여행’에 관한 소박하면서도 친절한 여행기
언제부턴가 깊은 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모든 게 불분명하다는 이유만으로,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흐릿하다는 이유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날이 하루하루 쌓여갔습니다. 그때마다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되도록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에든버러와 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에든버러로 가야 할 것 같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후회하기보다 비록 힘들더라도 일단 시도라도 해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붙잡고 싶었으니까요. 뉴욕, 런던, 파리, 베를린…… 혹은 다른 어디를 고민할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에든버러 홀릭, 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저에겐 오직 에든버러뿐이었습니다.
런던 킹스크로스(King’s Cross railway station) 역에서 에든버러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작가 조앤 K. 롤링이 쓴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해리가 마법학교 호그와트로 가는 기차를 탔던 바로 그 역입니다. 킹스크로스 역은 런던에서 스코틀랜드를 포함한 영국 북부 지방을 연결하는 발착지로 해리가 호그와트행 기차를 탔던 ‘9와 3/4 플랫폼’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곳입니다. 마법의 세계로 향하는 유일한 관문인 이곳처럼 런던에서 스코틀랜드로 가는 관문인 킹스크로스 역에 도착하니 스코틀랜드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마법의 세계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여행은 이처럼 현실의 삶과는 또 다른 판타지를 꿈꾸게 합니다. 기차에 몸을 실어 차창 밖을 보니 넓은 평야와 양떼들이 보이는 평화로운 풍경이 계속됩니다. 북부로 갈수록 조금씩 달라지는 건축 양식을 보는 것도 흥미롭고, 중간 중간 정차하는 요크, 뉴캐슬 등의 기차역과 도시의 풍경을 보는 것도 색다릅니다. 기차는 약 4시간 40분을 달려 에든버러 웨일버리 역에 서서히 정차합니다. 스코틀랜드 특유의 습기 찬 공기와 안개를 첫인상으로 이곳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스코티시들의 긍지와 자존심으로 세워진 에든버러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고풍스러운 도시입니다. 그을린 듯한 건물과 흐린 날씨, 도시 곳곳에 아로새겨진 역사와 개성이 한데 어우러져 에든버러만의 독특한 매력을 자아냅니다. 에든버러에서 처음 눈을 떠 창문을 열었을 때, 세월의 때가 묻고 그을린 듯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이 도시가 너무 궁금해 지갑을 챙겨 나갔습니다. 이 도시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기에 호텔 리셉션에 레스토랑이 많은 곳을 물어보았습니다. 돌로 이루어진 골목을 3분 남짓 걸으면 글라스마켓이랍니다. 그을린 건물 사이로 쭉 걸어가니 작은 광장 같은 곳이 나타났습니다.
먼 땅, 낯선 도시에서의 시작은 한마디로 뒤죽박죽이었습니다. 행운의 여신은 내 편이야, 라고 생각할 정도로 술술 풀리다가도, 홀로 방에 처박혀 눈물을 뚝뚝 흘릴 만큼 원망스러운 나날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엎치락뒤치락 좌충우돌하다보니 어느새 에든버러의 공기가 서울의 그것만큼 익숙해졌습니다. 이층버스 더블 데커(Double Decker)의 2층 맨 앞자리에 앉아 에든버러를 둘러보노라면 마치 중세시대로 거슬러 온 듯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에든버러에서의 6개월은 지금 생각해도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나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한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처음 저는 그곳의 분위기와 사람들, 풍경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그토록 동경하던 곳에서 제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나는 더 강해졌습니다. 에든버러는 저에게 ‘가능성’이라는 단어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저는 에든버러에서 영어와 디자인을 공부했습니다. 에든버러 예술대학교에서의 드로잉 수업.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 낯선 사람들, 이미 알고 있는 것도 처음 접한 것 같은 생경한 분위기에서 저는 수업 내내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 수업시간이 끝나자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어나왔습니다. ‘나는 이곳에 디자인을 공부하러 온 게 아니야. 인생 공부를 하러 온 거야’라고 쿨하게 넘기고 싶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뒤죽박죽. 디자인을 향한 애정도 무거운 돌처럼 마음속 저 아래로 자꾸만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디자이너의 성장과 성숙은 작품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거라는, 한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야. 내가 디자인을 시작한 이유, 내가 스코틀랜드를 찾은 이유를 다시 복기하면 되는 거야. 정답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즐겁게, 행복하게, 자신 있게 나만의 방식으로 창조적인 작업을 하겠다고 이곳에 온 것이니까요.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시간이 차츰 지나고 언젠가부터 선생님이 학생들을 불러 모아 저의 드로잉이 독특하다며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이후 학생들도 하나둘 제게 다가와 호기심을 보이고, 그림을 함께 의논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제가 스코틀랜드에서 짧지만 디자인을 진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건 ‘마음’ 덕분이었습니다. 마음이 진심으로 느끼면 자신도 모르게 방향이 바뀌고, 그림 혹은 작업의 결과물은 천천히, 조금씩 새로워집니다. 마음으로 그린 그림. 에든버러 예술대학교 드로잉 수업은 저에게 예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아니 마음을 심어주었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자신이 선택한 일을 즐기고 있나요, 그 일에 흠뻑 빠져들었나요?
주말이 되면 에든버러에서 글래스고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곤 했습니다. 제가 글래스고를 즐겨 찾는 이유는 하나, 다채롭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 특유의 정신성과 다양성이 어우러진 글래스고만의 독특한 예술과 낯선 아름다움은 분명 감동적이었습니다. 글래스고는 스코틀랜드 경제의 중심지로, 에든버러와는 사뭇 다른 활기찬 분위기의 세련되고 스타일 있는 건축, 디자인이 돋보이는 도시입니다. 시내에는 쇼핑 지역과 카페, 레스토랑이 있고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여 생동감이 넘칩니다. 옛 스코틀랜드의 수도, 스털링도 꼭 가보시길 권합니다. 기차역부터 이어진 비탈길을 따라 형성된 스코틀랜드 중부의 조용한 중소도시로, 낡고 오래된 집들을 구경하며 비탈을 오르다보면 바위산에 우뚝 솟은 스털링 성을 볼 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북부에 걸친 황량한 지대, 하일랜드는 대자연의 숭고미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거친 협곡과 세찬 바람 때문일까요? 갈색의 마른 수풀만이 자라는 이곳은 중소도시 몇 곳을 제외하면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맑지만 어두운 빛깔을 내는 네스 호가 소리 없이 흐르는 곳이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다르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어보곤 합니다. 저에게 다르다는 것은 나만의 개성을 가지고 꿋꿋이 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도시와는 다른 자신만의 개성을 지키며 한 발 한 발 묵묵히 나아가는 스코틀랜드의 도시처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남과의 ‘다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좀 더 크고 많은 선물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여행은 이렇게 말합니다. 떠나면 될 것을, 살아보면 될 것을, 그동안 왜 그리 두려워했느냐고 어깨를 툭하고 건드립니다. 에든버러와 글래스고, 스털링, 하일랜드…… 스코틀랜드에서의 하루하루는 그동안 막연한 두려움으로 볼 수 없었던,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여행이 저에게 안겨준 선물은 세상을 향한 깊은 관심이었습니다. 제 영혼은 스코틀랜드 덕분에 한 뼘 더 자랄 수 있었습니다.
『Scotch Day(스카치 데이)』는 스코틀랜드에서의 추억을 차곡차곡 담은 작은 책입니다. 영어와 디자인을 배우겠다는 의지와 스코틀랜드라는 이국에 대한 호기심에 부풀어 머나먼 땅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덜컹 날아온 제가 이곳에서의 기억들을 차근차근 정리해 한 권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스코틀랜드 여행을 돕기 위해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생략하는 대신 꼭 필요한 정보를 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가 일일이 확인해서 만든 ‘지도’ 역시 여러분의 스코틀랜드 여행에 좋은 친구가 될 것입니다. 중세시대에 온 것 같은 비현실적인 나라, 스코틀랜드에서의 추억을 간직하고 다른 사람의 스코틀랜드 여행에 작은 도움이 되는 책이 되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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