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과 붓으로 우리 시대 삶의 풍경의 리얼리티를 담고 있는 화가 유근택의 예술세계를 담은 책. 1999년부터 지금까지 그가 미술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삶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오광수, 카이 홍, 박영택, 기혜경, 고충환, 강수미 등 국내 미술평단의 내로라하는 평론가들의 글과 소장파 미술이론가(윤동희-이대범)와 나눈 ‘대담’이 200여 점에 달하는 풍성한 도판을 정교하게 뒷받침해준다.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교수답게, 미술대학(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을 위한 소중한 고언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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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동양화가 유근택 교수(성신여대)의 그림은 일상의 한 귀퉁이를 화면에 담아낸다. 세상에 빈약한 대상은 없다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그림은 우리네 삶을 함축적으로 압축한다.
알다시피 ‘일상’이란 화두(話頭)는 2000년대 우리 미술동네에서 즐겨 쓰던 화두(畵頭)이다. 20~40대의 젊은 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고 시도해본 주제다. 민주화와 전지구화라는 거대담론이 묵직하게 내려앉던 1980~90년대 미술계에서는 가급적 꺼려했던 소재, 설령 작품에 담는다 해도 키치(가짜 또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사이비 등을 뜻하는 미술 용어)적 방식을 가미하거나 입체설치-영상의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다루었던 화제(畵題)를 그는 묵묵히 ‘한국화’에 포개어 나갔다. 비엔날레(2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국제미술전시)와 레지던시(특정 지역의 특정 미술공간에서 일정 기간 동안 머물면서 작업 및 전시를 하는 작가 거주 프로그램)라는 현대미술을 상징하는 제도 속에서 큐레이터와 평론가의 시야에 포착되기 위해서는 ‘비’일상적-서구적 작업을 해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작가들 사이에 깔려 있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미술이란 특정 시대, 특정 형식에 영합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형식이란 바로 ‘나’, 즉 화가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나와 자연이 만나는 지점, 그곳이 바로 삶의 전통과 연결된 것이라는 고집을 한 번도 꺾지 않았다.
이런 그가 자신의 화력(畵歷) 20년을 기념해 한 권의 책을 펴냈다. 발단은 자신의 성북동 작업실에 켜켜이 쌓여 있던 ‘드로잉’이었다.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대표작들의 설계도이자 화가 유근택의 세계관을 형성해온 드로잉을 한 번쯤 기념하고 싶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전시와 그림책들이 완성작에 힘을 줄 때, 그것의 모태가 되는 드로잉을 함께 보여주는 책 한 권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드로잉은 화선지에 붓으로 직접 데생한 모필(毛筆)소묘가 아니던가. 그렇게 몇 달을 고민하다 출판사 북노마드 윤동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1999년 당시 주목받던 ‘젊은 작가’ 유근택의 그림을 역사와 시간의 고용한 소용돌이로 엉켜 있는 태풍의 눈으로 써내려갔던 미술전문기자이자,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성신여대 동양화과에 출강해 예술철학을 강의하는 그라면 자신의 고민을 책으로 함께 풀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 두 사람은 유근택의 성북동 작업실을 들락거리며 책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1999년부터 지금까지의 작업을 중심으로, 역사와 시간을 넘어 지금 유근택의 그림을 설명할 수 있는 ‘일상의 풍경’을 테마로 하자 식으로 책의 얼개가 하나씩 짜여졌다. 2,400여 점의 작품이 200여 점으로 압축됐다. 각각의 시기, 여러 매체에 소개된 글들 가운데 유근택의 예술 세계를 정리할 수 있는 글들을 선별해 그림 사이사이마다 배치했다. 오광수(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카이 홍, 박영택(경기대 교수), 기혜경(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고충환(미술평론가), 강수미(동덕여대 교수) 등 국내 미술평단의 내로라하는 이들이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여기에 소장파 미술이론가(윤동희-이대범)와 나눈 ‘대담’을 책의 말미에 덧붙였다. 역사, 시간, 동시대, 초상, 일상, 수묵, 기억, 식물성, 드로잉, 몸, 한국화의 현대성, 원시성, 태도 등의 테마가 유근택의 그림에 덧입혀졌다. 모두 지난 20년간 우리 미술계가 몸으로 부둥켜안고 천착해온 주제였다. 화가 유근택의 지난 20년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음은 물론이다.
유근택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먹’이라는 건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고. 누군가는 거기에 사상과 정신을 갖다 붙이지만 그저 다루는 사람에 의해 그 빛이 다르게 변할 뿐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먹을 다루는 이가 바로 ‘유근택’이라면 세상 어디에서 볼 수 없는 빛으로 번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습성화된 그림을 싫어하고 동시에 두려워하는 그가 담는 일상의 풍경은 진지한 숨소리처럼 끝없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그의 풍경은 지독하고 집요한 그리기의 몰입을 통해 거둔 ‘지독한’ 풍경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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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화면에서 나는 가급적 형태를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단지 형태를 통해 하나의 ‘상황’을 연출하려 한다. 마치 연극 무대를 연출하는 연출가처럼 화면을 하나의 사건 현장으로 정지시키거나 움직이게 하고 싶다. 화면은 현실이자 동시에 현장이다. 그 안에서 역사나 사건은 손님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머무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목표로 삼는 리얼리티의 궁극이다.
- ‘작가노트’ 중에서
시간과 가족, 일상의 개념의 조응을 추구했기 때문일까? 그의 작품에는 거침과 부드러움의 양면성이 교차한다. 그 경계 위에서 양쪽을 오가는 ‘시간’은 결코 우리에게 평온하지만은 않다는 걸 말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부르려 한다. 유근택의 그림은 ‘태풍의 눈’이라고, 우리는 그 적막함 가운데 잠시 멈춰 서 있는 거라고. ‘시간’이라는 태풍의 눈은 멈춘 듯 보이지만 조금씩 조금씩, 거대한 발걸음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이다.
- ‘시간, 그리고 태풍의 눈’(윤동희) 중에서
서
자신의 집안일이나 길의 풍경을 그리는 유근택은 결코 유치하지 않다. 그의 그림은 문기(文氣), 즉 인문학적 지평의 면에서 결코 산수화나 사군자, 추상화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집안의 난잡한 풍경을 그리고, 서울에서 유성까지의 지루한 고속도로변 풍경을 그림으로써 우리 시대 우리가 처한 난제들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 난제들이야말로 우리의 진경이기 때문이다.
- ‘어쩔 수 없는 난제 : 서울에서 유성, 동양화에서 한국화까지’(강수미)
유근택의 그림은 한결 같이 뭉개진 윤곽들, 모호한 떨림들, 흔들리는 붓질, 격렬한 운동, 세상의 모든 소리와 질감을 촉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수평으로 쓸어내듯 문질러지는 붓질들이 속도감 있게 화면 위를 지나간다. 종이의 표면 위를 쓸고 다니고 스며들고 얼룩진다. 터치들은 화면을 평면적으로 인식시키고 시간의 흐름으로 채워나가면서 동시에 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을 유동시키고 진동시킨다. 그것은 다분히 영상적이다. 소멸에 맞서 잠시 멈춰선 세계의 찰나적 장면, 모종의 회억(回憶)을 아련하게 부추기는 치명적이고도 슬픈 풍경이다.
- ‘몸의 풍경’(박영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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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유근택
1965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관훈미술관 첫번째 개인전에서 40미터 초대형작 '유적, 토카타-질주' 등 인간 내면의 울림에 대한 회화적 질문과 화두를 던졌다. 이후 동양화를 지나친 거대담론으로부터 인간의 주변으로 끌어내리는 조형적 실험에 몰두했다. 1995년, 6명의 개인전을 하나로 묶은 '일상의 힘, 체험이 옮겨질 때'전(관훈갤러리)을 기획하여 동양화에서의 일상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금호미술관, 원서갤러리, 동산방화랑, 사비나미술관, 갤러리현대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인간의 주변과 시간에 대한 해석을 담은 독특한 화풍으로 석남미술상(2000),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3), 하종현 미술상(2009)을 수상했다.
현재 성신여대 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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