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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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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연준 지음 - 111x184 - 304쪽 - 12,500원 - 2014년 10월 31일 - 978-89-97835-67-6 (03810) - 031.955.2675(편집) 031.955.1935(마케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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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연준의 ‘첫’ 산문집. 2004년 등단하고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과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두 권의 시집을 냈던 박연준은 시인 특유의 호기심과 시야각을 통해 세상을 보고, 오래 관찰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것들을 발견하는데, 이 책 『소란』을 통해 기억조차 하지 못했던 유년의 한 시절과 이미 사라져버린 어제를 적나라하게 끄집어낸다. 끄집어내서는 껍데기 없이, 거짓 없이, 부끄러움 없이 ‘날 것’의 언어로 그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발견한 것들을 하나씩 마주하노라면, 읽는 이의 마음도 다시금 소란해진다. 이를테면 자신에게도 그런 ‘순간’과 ‘언어’들이 있었음을 발견하는 것.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려서 잊어버려서, 잃고 잊은 줄조차 몰랐던 것들을 발견하는 것. 독자는 거울을 보거나 오래된 일기장 혹은 사진을 꺼내어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맨 얼굴을 보게 되고, 그 소란스러운 발견은 삶을 다시 살아내게 만드는 밑알(소란)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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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일은 언제나 ‘소란’스럽다. 잃고 잊는 일로 늘 소란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잃는 줄도 잊는 줄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사라지는 일’이란 대부분 볼륨이 낮아서, 그 작은 소란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지금을 잘 살아내기 위해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린다. 그렇다면 우리가 잃고 잊은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흔적도 없이 영영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것일까. 꼬리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이미 멀리 도망쳐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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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우산을 잃어버렸다고 진정으로 속상해하던 때가 언제였지? 나는 우산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잃고 살면서도 멀쩡한 얼굴로 잘도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마음이 말랑했을 때 되풀이해 읽던 『어린왕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비밀을 가르쳐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건조한 세상에서 눈 뜬 장님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나는 안녕한지, 잘 지내는지, 자신이 없다.
- ‘들어가며’ 중에서
힘들이지 않고 발기하던 때, 힘들이지 않고 시와 몸 섞던 시절은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그건 어린아이들이나 아직 무엇으로든 변화가 가능한 사람들만의 영역일지 모른다. 나는 이미 조금은 나이를 먹었고, 조금은 때가 탔으며, 조금은 돈 생각을 하는 딴따라가 되었고, 조금은 나태해졌고, 조금은 글러먹었을지 모른다.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좋은 시인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시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쓰겠다. 절필이야말로 진정한 배교다. 시 쓰기를 어려워하며(우리 모든 시인들처럼), 끝내 포기하지 않고 시를 유예해놓을 것이다. 모든 사랑을 유예하고 싶듯이, 내가 쓸 수 있는 시나 쓸 수 없는 시를 끊임없이 유예하는 마음으로 그저, 지금이 아니라 다음. 그다음. 그다음에 더 잘 쓸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어리석게 믿으면서. 닿을 수 없는 먼 곳에다 쓰고 싶은 시를 기약해놓을 것이다. 그때 나는 시를 쓸 수 있을 것이고,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그냥 겨우, 겨우, 몇 자를 뱉어내는 ‘노력’을 할 뿐이다. - ‘도레미파솔라‘시’도 속에 잠긴 시(詩)’ 중에서
서
누군가 죽었다는 것은 그를 부를 ‘호칭’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름은 남아도 호칭은 죽는다. 가령 길동이가 죽었다면 ‘길동이’라는 이름은 남을 수 있지만, ‘길동아’라고 부를 수 있는 호칭은 함께 죽는 것이다. “아빠!”라는 입소리는 내게서 죽은 말이다. - ‘신발 가게’ 중에서
사랑이 질병인 것처럼, 내 이십대는 질병과 같았다. 슬픔도 가장 격렬한 슬픔만, 아픔도 가장 치명적인 아픔만 골라 껴안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슬픔은 폭죽처럼 터져버렸고, 이미 사라졌다. 시간이 갈수록 폭죽에 대한 기억도, 귓가를 울리던 굉음도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한 시절 사랑한 것들과 그로 인해 품었던 슬픔들이 남은 내 삶의 토대를 이룰 것임을 알고 있다. 슬픔을 지나온 힘으로 앞으로 올 새로운 슬픔까지 긍정할 수 있음을, 세상은 슬픔의 힘으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이제 나는, 겨우, 믿는다. - ‘슬픔은 슬픔대로 즐겁다’ 중에서 오늘의 불안이 등짝을 맞고 시무룩해졌던 유년의 나에게 귓속말을 하는 밤.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를 때가 있다. 내 진짜 모습. 깎이기 전 원석의 내 모습, 아무것도 아닌 첫 찰흙 그대로의 내 모습! 어쩌면 처음 느낀 부끄러움이나 가벼운 죄의식, 그리움이나 불안, 연민과 두려움, 날것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술렁이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어디에 살고 있는 것일까?
눈을 감고 오래된 터널을 걸어가다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유년에 가 산다. 유년에서 아직 살고 있다. 때문에 오늘 낮에 내 옆모습이 굳어졌고 불안했으며,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유년에 아직 살고 있는 무엇 때문에 내일 나는 우울하거나 발랄하거나 어쩌면 축축할 것이다.
만져보고 싶은 것은 등짝을 얻어맞기 전에, 아니 등짝을 맞더라도 만져보자. 유년에 아직 많은 것들이 살고 있을 테니까.
-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유년에 가 산다’ 중에서 물론 생각이 날 때가 있지. 아주 가끔. '걸어도 걸어도'란 일본 영화를 보고 난 직후라든가, 피곤한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 힘없이 단추를 풀 때. 혹은 치약을 짜다가 별안간. 청국장을 끓이다가 문득. 마치 먼 옛날 애인처럼 떠오르지. 내게 그런 애인이 정말 있었나, 싶은. 여기까지 쓰다가, 여러 번 멈췄어.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갑자기 당신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드니 힘드네. 있잖아, 장롱에 아슬아슬 쌓아놓은 이불들이 기어코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처럼. 아빠가 쏟아지네. 감당이 안 되는데, 아프진 않아. 이불은 그렇잖아. 무거워도 질식하게 두진 않고, 따뜻하고, 숨겨주잖아. 아빠가 살아 있을 때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픈 적 많았는데, 지금은 안 그래. 그냥 아련하고 따뜻해. 다행이지? 충분히 사랑했잖아요, 우리. - ‘가는 봄에게 목례를 _죽은 아빠에게’ 중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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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모든 소란은 고요를 기를 수 있다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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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朴蓮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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