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미술이란 참 희한한 것이어서, 사실과 의견, 객관과 주관, 이성과 감정의 언어와 이미지가 한 몸을 이룬다. 이것은 무엇이다, 라고 정의하는 것과 이것은 왜, 라는 이유를 캐묻는 과학적 사고와 내 눈에 들어오고 내 마음을 파고드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겠다는 정서적 생각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게 미술이다. 군더더기 없는 작업과 난잡한 작업이 같은 사실에 바탕을 두고 같은 신념으로 같은 지향점을 찾아가는 게 미술이다. 쉽게 읽히는 미술이 단순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넘어 깊은 관념을 가짐으로써 좋은 미술의 반열에 오르고, 세상을 정밀하게 해체할 것 같은 난해한 미술이 교과서적 교양에 머물러 더 오르지 못하는 것이 미술이다. 물론 좋은 미술은 무엇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는 늘 있어왔다. 그런데 지나치게 도식화된 재현의 미술과 개인의 감정에만 몰두하는 미술을 좋은 미술에서 제외시키면서도, 어느 순간 그런 미술 앞에서 좋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미술이다. 문학적인 상상력(文), 역사적인 의미화(史), 철학적인 분석(哲)을 바탕에 두었지만 그 ‘형식’이 새롭지도, 온전하지도 않아서 좋은 미술로 불리지 않는 경우도 있고, 흠결 없는 형식과 내용을 갖추었지만 ‘나는 이런 작가다’라는 자의식이 넘쳐 꺼려지는 미술도 종종 보게 된다.
작가의 경륜이라는 것도 절대적 기준이 되지 못한다. 생전의 김현은 대가들의 시는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완성된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정작 힘 있는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고 적은 바 있는데 이는 미술에도 적용된다. 모든 것을 자르고 베어낸 절제의 미술보다 모든 것을 수용하는 젊은 미술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전설이 된 문학평론가의 글은 말해준다. 나는 누구인가를 정직하게 밝히는 대화, 그것은 내가 아님을 단호히 말하는 대화는 세파에 닳고 닳은 작가에게서가 아니라 불안한 젊은 작가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아는 노련한 미술보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정직한 미술이 더욱 와 닿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의 아이러니이자 삶의 모순이다. 결국 좋은 미술은 존재하지만, 그것의 현현은 저마다 다르다는 것. 그래서 미술은 어렵고, 그만큼 흥미롭다.
만남과 헤어짐. 만약 좋은 미술이라는 게 있다면 서로 다른 이 두 단어가 한 몸을 이루는 미술이 아닐까 한다. 내 생각과 내 느낌이 너의 생각과 너의 느낌이 될 수 있는 것, 누군가를 만나려 했던 나의 대화가 너로 인해 다른 곳에 도달하거나 아예 가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 그 예측불허의 엇갈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술이 좋은 미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런 미술은 모두가 특별하다고, 소중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정반대의 지점에 놓여 있을 것이다. 이름 하여 수줍은 미술. 이제 미술은 좀더 수줍어야 한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판단하는 것보다 사유하고 사색하고 상상하고 관찰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자,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즉시 발설하는 것보다 ‘한참’이라는 ‘수줍음의 시간’이 필요한 자. 우리 시대의 미술가는 그래야 할 것이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 작가 나라 요시토모도 같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화난 것 같은, 무언가를 강하게 호소하는 듯한 눈이 인상적인 소녀를 그리는 그에게는 ‘세라믹’이라는 또다른 작업이 있다. 일본의 미술저널 《미술수첩》(2010년 7월)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2006~2007년에 카나자와 21세기 미술관에서 열렸던 월야곡(Moonlight Serenade)전을 치르면서 도예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도쿄를 떠나 카나자와라는 낯선 곳에 체류하는 동안 “장소를 바꿔 작업을 만드는 것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흥미, 즉 그에게 도예라는 것은 리얼리티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본 작업을 하다가 기분 전환을 위해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도예를 전문으로 하는 레지던시에 참여하며, 도예의 역사와 흙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물레의 회전 방법을 몸으로 기억하게 되었고, 새로운 흥미가 우러나서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을 레지던시에서 흙을 만지며 보냈다. 그런데 그 낯선 시간이 요시토모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미술대학을 나와 그림을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된 이후, 자신이 정한 어느 때에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결실을 맺겠다고 작업하는 게 아니라 “그냥 혼자서 여행하고 있는” 기분으로 머물렀던 그 시간이 미술에 대해 가볍게 그러나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요시토모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업하지 않는 시간이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자신과 작품의 관계만큼 중요한 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실제로 요시토모는 세라믹 작업을 통해 소녀 그림을 동시다발적으로 벽에 배치할 때는 알지 못했던 관객과 작품 사이의 ‘관계’를 깨달았다고 말한다. 작은 전시실에 하나만 놓여 있는 처럼, 요시토모의 작업은 절에서 불상을 배견(拝見, 삼가 절하고 보는 것, 작품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는 것)하듯 보게 만든다. 그 보는 행위에는 어떤 정신성이 깃들어 있어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작가와 작품 사이의 관계를 유추하게 된다. 도자기를 빚는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잉태시키는 작가의 정신성이 관객에게 세상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 없는 체험을 안겨준다는 요시토모의 믿음은, 그저 어떤 공간에서 전시를 갖고, 어디에 전시를 홍보하고, 누가 전시를 볼 것인지에 몰두하는 작가들과는 다르다. 요시토모는 단언한다. “관객에게 정신적 체험을 주는 힘이 없어지면 작품은 싸구려 같은 물건이 됩니다.” 자신만의 정신적인 세계를 가진 작가, 자신이 무슨 작업을 하는지 대중이 몰라도 상관없다는 담대함, 오히려 소수의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남는 게 좋다고 믿는 용기, 언론과 대중에 알려지지 않아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전시를 치르겠다는 각오, 자신과 작품, 자신과 전시 공간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순수함이 그 정신성의 질료가 될 것이다.
북노마드 미술무크지 《debut》는 이름 그대로 미술계에 데뷔한 혹은 데뷔를 앞둔 이들을 마음에 품고 만든다. 요시토모에 따르면 그 시기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 수 있는” 때이다. 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고, 평가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할 수 있는 그 ‘때’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지금 우리는 정신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음악도, 미술도. 디스플레이적인 전시도 샘플링인 거죠. 저는 단 한 점으로 옛날의 도자기가 가진 ‘강한’ 물건을 만들고 싶었어요.” 미술은 형식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너져도 관객이 보충할 수 있는 정신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요시토모가 (재)정의하는 미술에 고개를 끄덕여본다. 《debut》 5호에 자신의 ‘Next Plan'을 기꺼이 공개해준 미술인 84인의 목소리와 가장 ‘핫(hot)’한 공간으로 떠오른 커먼센터, 시청각, 윌링앤딜링을 이끄는 3인의 큐레이터(함영준, 현시원, 김인선)와의 대화, 그리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자기 작업을 묵묵히 해나가는 6인의 젊은 작가들(민호선, 박성경, 백단비, 장은의, 전현선, 조민아) 역시 요시토모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드라마 <미생>의 대사처럼 말이다. “남들에게 보이는 것은 상관없어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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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생전의 김현은 대가들의 시는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완성된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정작 힘 있는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고 적은 바 있는데 이는 미술에도 적용된다. 모든 것을 자르고 베어낸 절제의 미술보다 모든 것을 수용하는 젊은 미술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전설이 된 문학평론가의 글은 말해준다. 나는 누구인가를 정직하게 밝히는 대화, 그것은 내가 아님을 단호히 말하는 대화는 세파에 닳고 닳은 작가에게서가 아니라 불안한 젊은 작가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아는 노련한 미술보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정직한 미술이 더욱 와 닿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의 아이러니이자 삶의 모순이다. 결국 좋은 미술은 존재하지만, 그것의 현현은 저마다 다르다는 것. 그래서 미술은 어렵고, 그만큼 흥미롭다.
- ‘editorial 수줍은 미술’ 중에서
나에게 큐레이팅이란 연구 대상과 방식을 정하는 것이다. 배치와 점프를 통해서 사고의 수집을 제시하는 것이다. 움직이며 살아 있거나 이미 죽어 있는 수많은 작가들의 작업을 이 현실(동시대)의 특정한 공간 안에서 보는 것이다. 비약과 점프가 있는 동시에 객관적 연구와 충실한 인문학적 조사가 병행되는 전시, 전시장 안에서 관람자와 작품이 어떻게 서로 작동하는가를 느낄 수 있는 전시를 만들고 싶다. 특정한 세계 속으로 확 들어갔다가 톡 쏘아붙여서 나와야 하는 경험을 할 때 관람자로서 전시장에 있고 싶어진다. ‘새로운’ 미술은 분명 있다. 새로운 작가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무리 기존과 비슷하거나 다른 작업을 하든, 아니면 상관하지 않든지 간에 어떤 자리에 자신의 작업을 위치시키고 무엇을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그것은 과거나 미래와는 다른 새로운 것이다.
- ‘collective interview 윌링앤딜링, 커먼센터, 시청각을 만드는 사람들’ 중에서
그림을 그리는 자는 사소해야 한다. 별것 아닌 것, 작은 것,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 내일 무엇을 할까를 계획하는 작가보다 오늘 무엇을 그릴까를 고민하는 자에게 믿음이 가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세상을 판단하기보다 아무도 보지 않는 사소함을 ‘관찰’하는 자로 살아가는 자가 많아지면 좋겠다. 작가 장은의처럼 좋은 안목을 갖춘 관찰자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사실 지금 우리 미술은 너무 치장되어 있다. 너무 말이 많다. 저마다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미술 속에서, 지구의 ‘서쪽’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는 동시대 미술 속에서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는 자, 내 발밑을 내려다보고 내 곁을 성찰하는 데 좀더 겨를을 내는 자가 많아지면 좋겠다. 그런 자가 그리는 미술, 그 미술이 전하는 어떤 ‘마음’이 전하는 목소리에 세상이 귀를 기울이면 좋겠다. 누가 그랬던가. 모든 인간은 마음속에 아픈 부분이 있다고.
- ‘yBa ‘회화’로 돌아온 두번째 삶, 그 사소한 환상’ 중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이 정지(stop)된 것이 아니라 아직 열리지 않은 ‘일단 멈춤(pause)’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인용하고 있는 청춘의 ‘담론’을 믿기로 했다. 이제 오래지 않아, 사회적 구조와 어른들에 의해 봉인된 ‘일단 멈춤’이 해제되는 순간, 그들은 어디론가 힘차게 탈주해나갈 것이다. 그들은 시대가 강요한 고식적인 청춘의 정체성에 순응하지 않고 끊임없는 해체를 갈구하는 생성(being)의 정체성으로 변화할 것이다. 그 끊임없는 해체와 그로부터 새롭게 만들어지는 ‘관계의 조직’(신영복)을 엮어나갈 그들의 ‘다음’이 기다려진다. 그 관계성은 세상이 지키려 하는 수직과 세상이 그들에게 원하는 수평의 만남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사선(斜線)’일 것이다. 우리의 청춘은 그 미끄러지는 힘으로 세상 밖으로 나갈 것이고, 세상 너머로 자신을 연결시킬 것이다.
- ‘yBa 미술/현실 인식과 초월, 그 미끄러지는 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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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editorial
수줍은 미술 - 윤동희
new artist
한 줄의 실, 한 순간의 은유 - 민호선
고독한 개인, 고독한 군중 - 조민아
서툰 관찰자의 무한한 상상 - 전현선
special issue
미술인 84인의 Next Plan
collective interview
윌링앤딜링, 커먼센터, 시청각을 만드는 사람들
- 김인선 함영준 현시원
yBa
‘회화’로 돌아온 두번째 삶, 그 사소한 환상 - 장은의
미술/현실 인식과 초월, 그 미끄러지는 힘 - 박성경+백단비
art & critic
양혜규論: 부유하는 형상, 충돌하는 감각, 코끼리는 없다 - 안소연
주재환論: 사람인가, 도깨비인가 - 현시원
차혜림論: 야마구치에서의 55일, 환생한 신화들 - 안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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