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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내일의 인문학

 

 

 

 

 

 

   

- 김신식, 송명관, 안천, 윤동희, 하승우 지음
- 128*188 / 156쪽
- 5,000원
- 2018년 1월 17일
- 979-11-86561-46-1 (05300)
- 010.4417.2905(대표)

         
 

‘인문학의 시대’라고 한다. 세상에 떠도는 소문이 그렇다. 사람들도 그렇게 믿는 듯하다. 고대 지중해의 현자들과 드넓은 중국 대륙의 현자들이 여기저기 소환되고 있다. 경제․경영 분야의 구루(Guru)들과 거대 기업 경영인들을 스승 삼아 최면을 걸던 자기계발서는 이제 인문학까지 포섭하며 시장을 넓히고 있다. 이 땅 곳곳에서 인문학을 제목 삼은 강좌도 넘쳐난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의 일상은 조금도 변한 게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인문학적 삶의 실천을 고민하는 ‘젊은’ 이론가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기계발 도구로 쓰이는 인문학을 넘어 우리가 서 있는 실제 위치와 경로를 나타내고, 우리가 지금 있는 곳과 앞으로 가고자 하는 곳을 모두 볼 수 있는 인문학의 지도를 그려달라고 청했다. 산문가이자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김신식은 내일의 사회학을, 『야전과 영원』 등을 번역한 일본문화 비평가 안천은 내일의 인문학을, 경제논객 송명관은 내일의 경제학을, 글과 말로 미술과 출판을 오가는 윤동희는 내일의 미술을, 그리고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하승우는 내일의 현실 정치를 고민해주었다. 『내일의 인문학』은 인문학으로 자신의 특정 상황을 진단하고 내일을 예감하는 일종의 지도다.

 




출판사 서평

『내일의 인문학』은 ‘내일의 사회학’을 전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산문가이자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하는 김신식에게 내일의 사회학은 ‘시학적 사회학’이다. 밑바닥이 없는 사회. 오늘날 사회적 무력감은 도약의 불가능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비극과 추락의 주인공도 될 수 없다는 절망에서 온다. 그래서 소수의 사회학은 시학적 사회학을 모색한다. 김신식은 문학의 에너지와 사회학의 에너지가 결합되었을 때 나타나는 시너지를 궁금해 한다.
사회학자들은 노멀의 미래를 재예측·재예언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뉴노멀’ 시대라고 부르는 오늘날, 저성장·저수익 사회가 심화될수록 새로움의 초점은 고(high)의 상태보다 저(low)의 상태에 기댄다. 탄생하자마자 추락을 감지하기. 김사과와 같은 시학적 사회학자는 저점 인간의 삶을 “0 이하의 날들”이라고 칭한다. 저점 인간의 삶이란 삶을 0만큼 가지고 있는 자들의 무력감이다. 저점 인간들에게 중요한 것은 0 이하로 주저앉는 것이다. 김사과는 0이라는 저변이 사라진 사회에서 0을 대체해 -n으로 사회적 저변의 정당성을 가까스로 옹립하려는 사회에 주목한다. 탄성이 +가 아닌 - 방향으로 더욱 활발해지는 상태. 김신식은 이를 ‘절망탄력성’으로 명명한다.

밑바닥이 없는 사회를 견디기, 불평등 시대의 생산과 분배를 고민하기

토마 피케티 열풍 이후 불평등 담론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우리 사회에서도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심각하다. 수년 동안 복지국가,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 기본소득 등 경제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대안담론들이 휩쓸고 지나갔다. 이 가운데 ‘소득주도성장론’이 급부상했다. 저성장 위기 속에서 기업의 이윤이 아닌 가계의 임금과 소득으로 소비를 늘려 투자와 고용을 증진시키자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소득주도성장론은 자본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 성장 이론이다. 이윤주도보다 임금주도에 의한 수요 창출이 산출을 늘리고 자본을 성장시키는 데 효과적이라는 주장이다. 당연히 임금과 이윤의 분할이라는 1차적 소득 분배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소득주도는 ‘부자주도’의 경제 활성화다. 그들은 주주 배당이나 부동산 거래 차익처럼 자본소득까지도 ‘가계소득 안정화’ 대책으로 둔갑시킨다.
경제논객 송명관은 경제 구조를 바꾸는 일은 정책 기조를 바꾸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정치권의 ‘사회적 대타협’으로 축소된 소득주도성장론은 과거의 결과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재벌의 실질적인 경제 권력과 독점을 축소시켜야 내일의 경제학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적절한 분배를 통해 삶의 위기를 해결하고 재생산의 기초를 닦는 것이 GDP 성장률에 종속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생산과 분배에 대한 더욱 담대한 전략을 요구하는 것, 내일의 경제학이 풀어야 할 과제는 여기에 있다.

자유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필독서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꿈꾼다. 그러나 자유의 꾸준한 확장은 선택지의 과잉 및 예기치 못한 새로운 선택지의 등장이라는 문제를 가져온다. 삶의 모든 국면에서 자유의지에 기반을 둔 선택을 해야 한다면 자유 자체가 굴레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자유의 무한한 확장을 무조건적인 선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자유’를 둘러싼 조건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문화 비평가 안천은 현대사회에서 자유의 고유한 의미를 사유해온 대표적인 학자인 일본의 사회학자 오사와 마사치를 통해 내일의 인문학의 지도를 그린다.
주지하다시피 막스 베버는 근대 산업 사회를 낳은 윤리적 기반으로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적 윤리를 꼽았다. 프로테스탄트들은 현재의 불안을 전지적이고 ‘초월적인 타자(신)의 내면화’로 극복했다. 과학이 ‘진리’를 담보해준다는 믿음이 존재하면 신을 믿지 않더라도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조차 ‘진리’의 담지자로서 기능하지 않는 사회가 도래했음을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는 알려준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가 그러했듯이,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도 위험이 현실화되면 과학으로도 컨트롤할 수 없다. 현대사회는 자유에 입각한 선택과 책임의 크기를 최종적으로 올바르게 판단해주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사와 마사치의 말처럼 ‘제3자의 심급’이 부재한 상황이다.
제3자의 심급은 사회를 부감하는 초월적 시점이자 주체를 주체로 만드는 타자가 위치하는 지점을 말한다. 왜 인간은 자기 의지로 세상에 태어난 것도 아닌데 자유와 책임을 지닌 존재로 살아가려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제3자의 심급으로 기능하는 기제가 없어서 더 자유로워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설정하기 어려워 자유 자체가 감옥처럼 느껴지는 상황이 되었다. 오사와 마사치의 『자유라는 감옥 – 책임·공공성·자본주의』를 정독해야 할 이유다.

개인과 소수가 소규모로 만드는 ‘틈’의 예술

미술기자와 편집자로 살아온 윤동희는 미술 현장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신생공간과 젊은 미술가들을 주목한다. 젊은 미술가들은 주체성을 믿는 ‘실존’과 기성세대의 ‘구조’를 비판하며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의 미술은 또래에게는 희망이지만 기성세대의 미적의식에는 위협이다. 제도권으로부터 ‘달아나고 또 달아나라’로의 이행을 실천하는 자들. 윤동희는 도주하는 자들에게서는 시대의 변화를 포착하는 센스와 우연에 대한 직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많다. 센스 없는 미술대학 학생은 사물과 대상을 다양하게 관찰하기 전에 익숙한 기억과 몸짓으로 그린다. 센스 없는 작가는 맥락 없는 전시 공간을 돈을 주고 빌려 전시한다. 오프닝에는 가족과 미술대학 동문들로 어수선하다. 그 광경은 고스란히 SNS에 남겨진다. 세대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기성 작가들은 여전히 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전시를 고집한다. 센스 없는 작가들은 대안 문화를 소비할 뿐, 세대교체의 자장을 형성하는 특정 커뮤니티가 공고해 그 속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윤동희의 생각은 다르다. 예민하고 독자적인 미의식을 ‘스스로’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센스 있는 예술가의 덕목이라는 것이다.
수평적으로 증식하여 뻗어나가는 리좀 같은 새로운 세대의 미술을 인정하고, 그들을 우회하여 수목적인 관계를 지탱하는 이전 세대의 미술을 존중하는 것. 세대는 다를지라도, 그들이 바라보는 미술의 형식이 차이가 있을지라도 시대의 막혀 있음에 저항하는 정신은 같다. 새로운 미술은 세대를 뛰어넘어 만족하지 못한 자들이 준비하는 것이다. 낡은 시대의 체제를 활주로 삼아 이륙하려 하는 사람들은 늘 ‘소수’다. 세상에는 ‘소규모’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내일의 미술은 작은 욕망을 가진 자들이 작은 변화들을 단계적으로 이끌어낼 때 만들어질 것이다. 무리를 벗어나 개인과 개인의 연결이 만들어내는 ‘틈’에서 생성되는 미술. 윤동희가 기대하는 내일의 미술은 ‘작은’ 미술이다.

세상의 속도와 반대로, 나만의 정체성 만들기!

촛불로 촉발된 정치의 시대는 1987년을 기원으로 삼는다. 1987년 개정헌법에 따라 만들어진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조기 대선은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으로 끝이 났다.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하승우는 1987년은 민주화운동의 승리이자 배반의 시대였고, 2017년은 1987년의 지속이자 반복이라고 정의한다.
‘87년 체제’는 민주화의 물꼬를 텄지만 기득권 체제를 와해시키지 못했고, 지배질서의 전환보다 정권 교체에 초점을 맞췄다. 국가가 뒷받침하는 재벌 중심의 경제성장주의는 바뀌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노동악법에 시달려야 했다. 보수적인 중앙 언론이 여론을 주도하는 현상도 바뀌지 않았다. 하승우는 지금이야말로 1987년과 2017년 체제를 실질적으로 극복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우선 헌법 개정보다 정당 체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정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새로운 정치 세력이 정치권에 진입할 수 있도록 개방적이고 비례성이 높은 선거 제도의 도입이 절실하다. 21세기 주요 의제들을 정치화시킬 진보정당이 정치적 대안으로 인정받으며 낡을 기득권 정치를 붕괴시키는 것, 진보정당이 생활세계의 다양한 결사체들과 손을 잡고 지구 질서 수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다양한 행위자들과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 하승우에게 내일의 현실 정치는 한국 정치에 부여된 어려운 숙제를 푸는 일이다.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을 바꾸고 위계질서를 뒤집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 내일의 현실 정치를 고민하는 하승우의 진단이다.


 




본문 중에서

지금 이 사회에 저변은 있는가. 밑바닥이 없는 사회, 인간은 내려간다는 기분에 둘러싸여 있다. 밑바닥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잘 내려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 오늘날 사회적 무력감은 도약의 불가능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비극의 주인공, 추락의 주인공도 될 수 없다는 절망에서 온다. 사회학이 과다하지만 사회학으로 해결 불가능한 시대. 소수의 사회학은 시학적 사회학을 모색한다. 문학이라는 양분을 받아들여 사회학적 언어로 전유·발명하려는 이들. 문학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회학자들의 출현이 있다. 문학의 에너지와 사회학의 에너지가 결합되었을 때 나타나는 시너지가 궁금하다.

- 김신식 ‘이번 비극도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중에서

*

경제 구조를 바꾸는 일은 정책 기조를 바꾸는 수준을 넘어선다. 사람이 바뀌어야 하는데 정책만 바뀐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정치권의 ‘사회적 대타협’으로 축소된 소득주도성장론은 과거의 결과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대타협이 이루어지더라도 구체적인 타협 대상인 재벌 체제를 우회할 수 없다. 재벌의 실질적인 경제 권력과 독점을 축소시켜야만 가능하다. 이익을 사회화하자는 우리의 주장은 손실을 감내한 대가이자 재생산을 보장하기 위한 전제다. 적절한 분배를 통해 삶의 위기를 해결하고 재생산의 기초를 닦는 것이 GDP 성장률에 종속될 이유는 없다. 소득주도성장론이 갖는 의의와 한계를 짚고, 합리적 교훈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생산과 분배에 대한 더욱 담대한 전략을 요구해야 한다.

- 송명관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되다, 소득주도성장론’ 중에서

*

자유의 꾸준한 확장은 선택지의 과잉 및 예기치 못한 새로운 선택지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가져오고 있다. 삶의 모든 국면에서 자유의지에 기반을 둔 선택을 해야 한다면 자유 자체가 굴레가 될 수도 있다. 예전과 달리 자유의 무한한 확장을 무조건적인 선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유’를 둘러싼 조건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현대사회에서의 자유의 고유한 의미를 사유해온 대표적인 학자가 있으니 일본의 사회학자 오사와 마사치이다.

- 안천 ‘오사와 마사치의 『자유라는 감옥 – 책임·공공성·자본주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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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미술은 ‘비전 없는’ 시대에 지나치게 ‘절망적인’ 미술이 될 것이다. 세대교체를 중심에 두고 이상한 비전 따위는 필요 없으니 동시대적 가치관에 종지부를 찍자는 아랫세대와, 비전 없는 시대는 깊이 공감하지만 종지부를 찍는 건 아니라고 답하는 윗세대가 서로에 대한 안티테제로 작용하는 모습, 그 절망과 희망의 변증법적 동시대성이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질을 찾는 것이다. 미술은 겉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철저하게 생각하는 일이다. 본질이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소중한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아내고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 그 본질이 바로 나의 태도이자 형식이자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를 계속 만드는 것밖에 없다.

- 윤동희 ‘생산에서 생성으로, 내일의 미술을 기대하며’ 중에서

*

한국은 일상 속에서 폭력이 ‘합법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중앙 언론사, 가부장, 남성, 상급자, 연장자의 폭력은 방치된다. 일상의 폭력들이 정치의 활성화를 방해한다. 한국정치의 변화를 가로막는 주요한 힘은 신자유주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정치는 ‘경제’를 내세우며 보수화되었다. 이런 반(反)정치는 사회의 해체로 이어졌다.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된 사회, 그런 사회에서 우리가 좋은 삶을 꿈꿀 수 있을까?

- 하승우 ‘새로운 민주주의는 없다고 치자!’ 중에서

 




차례

김신식    이번 비극도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8

송명관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되다, 소득주도성장론                                   34

안천       오사와 마사치의 『자유라는 감옥 – 책임·공공성·자본주의』   56

윤동희   생산에서 생성으로, 내일의 미술을 기대하며                                80

하승우   새로운 민주주의는 없다고 치자!                                                 116



지은이

김 신 식

산문가. 인문사회비평지 『말과활』 편집위원을 거쳐 현재 문예지 『문학과사회』와 사진잡지 『VOSTOK』 편집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주력 분야는 시각문화연구와 감정사회학이다.

송 명 관

서울대 응용생물화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부터 경제와 국제 정세에 관해 공부하며 인터넷 경제논객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류 경제학 비판과 국제연대 활동에 관심이 많으며 월간 《워커스》에 경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안 천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현대 일본문학을 전공했다. 도쿄대학 총합문화연구과 박사 과정에서 현대 일본 비평을 연구하고 만기 퇴학하였다.

윤 동 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서 문화연구와 영상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월간미술》, 안그라픽스, 광주비엔날레 학술지 《눈(noon)》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서울대 대학원, 이화여대 대학원, 성신여대 등에서 미술이론과 예술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세종대 회화과 겸임교수를 지냈다. 북노마드 대표다.

하 승 우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시민에게 권력을』 『껍데기 민주주의』『민주주의에 반하다』 등의 책을 썼다. 중심에서 벗어나는 삶을 여전히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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