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중에서
이것은 고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고민 속에서 솟아난 질문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아이들과 겪었던 웃기고도 슬프고 때로는 우당탕 무너져 내린 파편들이다. 나는 아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가르쳤고 웃었다. 일터의 일을 기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아이와 부모와 선생의 이해가 묶여 있는 이 매듭을 모두에게 건네고 싶었다.
“저 반은 애들이 참 맑네요?” 이 말은 강의실이 시끄럽다는 뜻이다.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쉿, 하며 손짓하지만 그들의 놀이를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웃음은 정말이지 시끄럽고 청량하다. 이런 걸 관찰하는 어른의 삶이라면 썩 나쁘지 않다고도 잠시 생각한다. 이걸 기록한다면, 그들도 모르게 이 단어가 십 년을 살아남는다면? 그들이 사라질 말이라고 꼽은 1순위를 들으면 우리의 시대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선생님. 스승의 날 선물 줘도 돼요?
나는 책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 시훈은 뒷말을 이어갔다.
- 어린이날 선물 주실 거죠?
보통 진실은 뒤에 있는 편이다.
- 故 김소형 선생님은 제가 질문을 할 때마다 창의적이라며 칭찬을 해주셨죠.
- 선생님. 죽었어?
- 네.
그는 덧붙였다.
- 제가 성공할 때쯤이면 저도 육십은 넘었을 테니까요.
생략된 죽음 앞에서, 웃음이 나왔다. 살아 있는 선생님의 장례를 이미 치른 아이들이 있지 않는가.
교무실에서 아이들의 공책을 뒤적인다. 부모는 알아볼 수 없는 글씨이지만 나는 안다. 아이들의 글자를 오래 들여다보면 저절로 열리는 세계가 있는 법이다. 그들의 서사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믿을 수 있다.
저학년을 가르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주기적인 호응이 있어야 하고 아이의 관심에 따라 조금은 휘둘려주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울기도 잘 울고 금세 입을 꾹 닫기도 하여 감정의 혼란 속에 덩그러니 놓인 나를 만나게 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호감을 사는 건 쉬운 일이다. 관심을 갖고 아이의 말에 귀 기울여주면 된다. 이건 어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라고 느낀다.
그는 열한 살이다. 나는 감동했다. 옆 친구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못 쓰겠어요, 봐봐, 쟤는 글씨도 예쁘잖아, 그들은 내가 뭘 읽었는지도 모르면서 말한다. 어린 친구는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선생님, 제가 쓴 건 시가 아닌 것 같아요, 이래도 돼요?” 하고 물었다. 다시 묻고 싶었다. 이게 시가 아니라면 뭐라고 할까?
아이가 설명한다. 부모님이 말하는 사춘기는 부모의 말을 안 듣기 시작할 때이며
자신은 자신의 생각이 생기기 시작하는 때가 사춘기라고 느낀다고 말한다. 사춘기는 느낌에 가까운 형상 같다. 아무래도 아이들은 주변 반응에 따라 자신이 사춘기구나, 깨닫거나 학습되는 거라고 말해볼 수 있겠다. 그들이 두려운 건 사춘기가 아니다.
아무리 똑똑해진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어른들이 내준다는 숙제는 엇비슷하다. 그중에서 반복되는 주된 내용이 있다면 바로 꿈을 주제로 한 페이지의 글을 쓰라는 것이다. 보통은 직업을 꿈이라고 적어오지만, 자신이 원하는 어떤 과정이어도 괜찮다고 귀띔을 해주면 글의 결은 달라진다.
아이는 가끔 뜬금없는 말을 한다. 그의 맥락과 세계는 나의 세계와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해준 말을 기억하면서 그에게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책임감을 갖고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일. 그건 어떤 지역에서도 가능한 이야기라고.
도무지 왜 아이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책을 설명할 때. 나는 나를 설득해야 한다. 책에서 말하는 모든 일이 사실은 너희에게는 태어나기도 전인
까마득한 옛날에 벌어졌다는 점. 나는 자꾸 ‘나 때는’을 말하는 생명체가 되어 있고,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면 그들이 흥미롭게 쳐다본다. 나는 사라진 걸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아이의 말을 곱씹는다.
차례
들어가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삶 / 8
1부. 코로나 이전 Before Corona
초대장 / 14
예쓰, 예쓰, 티처 / 16
눈술 / 17
I have a dream / 23
우리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자 / 25
자네, 유령을 아나? / 29
계룡이 / 34
인어의 뼈 / 35
못 산다 정말 / 40
신의 마음 / 41
꽃순이와 개똥이 / 43
故 김 선생 / 47
방구차 / 52
그 여름, 산타 / 53
231 232233 234 235 235236237 / 56
용왕은 멍청해서 약이 필요 없다 / 57
누구야? / 58
맹꽁이 / 59
마커 친구 / 63
이상한 선물 / 68
2부. 코로나 이후 After Corona
지탈 / 76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80
아이들의 채팅 / 83
호박 고구마 할머니 / 85
사춘기 / 87
물어볼 수 없지만 모르면 부끄러운 / 91
바퀴하우스 / 94
소송 / 99
우리는 잼민이니까요 / 104
넌 착해? / 109
아이들의 언어 / 112
‘tㅣ발점’ / 113
저희가 못 듣나 봐요 / 118
홍학 / 120
우리 시대의 문학적 상상력 / 124
어린 친구의 고백 / 131
카펫은 잘 지내요? / 132
선생님! 슈퍼 돼지! / 138
신은 죽였다 / 145
타인이 존재하는 이유 / 149
3부. 단계적 일상 회복 Living With Corona
아니요, 다 좋아요 / 158
머리하는 날 / 167
우리 애만 안 하는 건 좀 그래요 / 171
선생님, 결혼하셨어요? / 173
꾸륵꾸륵이 / 176
이 지역에서는 안 되죠 / 180
꿈이 없으면 어떡해요 / 185
배고파요 / 196
우정 / 200
역할극 / 202
5만 명 넘을 거니까 해요 / 207
미래 식량 / 210
특강 / 213
사라진 생명체 / 220
시간을 나눈 만큼 우리는 친밀해질까? / 225
나가며. 아이들의 연대기 / 228
부록. 엔데믹 Endemic
아이들에게 묻다 / 240
아이들과 인터뷰 / 242
작가의 말. 거기 계세요? /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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