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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결국, 느낌
-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여기 오해에 시달리는 단어가 있다. 시뮬라크르(simulacre). 가짜, 모조라는 오명 덕분에 세상이 기피하는 단어가 되고 말았다. 그것이야말로 오해다. 이 단어는 보들리야르식 해석이 아니라 들뢰즈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뮬라크르는 곧 ‘사건’이다. 순간적으로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것이다. A나 B가 아니라, A에서 B로 넘어가는 ‘순간’이 중요하다. 세상의 서쪽에 살든 동쪽에 살든 사람들은 존재와 무(無)를 가장 근원적인 사건으로 여긴다. 존재를 희망 삼아 가급적 무를 멀리하려 한다. 전통철학에서도 사건이란 아주 덧없는 것으로 여겨왔다. 오래가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대신 덧없는 것, 순간적인 것은 가치 없는 것, 허망한 것으로 생각했다. 고대(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신), 근대(데카르트)가 다르지 않았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모두 덧없는 것들이다. 바람이 불어야 깃발의 소리 없는 아우성의 의미를 사유하듯이 그 ‘순간적’인 것이 삶을 채워나간다. 현대철학은 그 ‘사건’을 어떻게 사유하느냐에, 현대미술은 그 ‘순간적’인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모든 것을 걸었다. 생성의 사유로서의 사건을 이해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의 차이는 이승과 저승만큼이나 멀다. A became B, A나 B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became(become)을 사유하는 자만이 세상의 기운생동을 느낄 수 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눈물의 ‘의미’를 느끼는 자만이 함께 울 수 있는 것과 같다. ‘슬픔’이라는 문화적, 인간적 관계로 넘어가는 그 경계선을 우리는 ‘예술’이라 부른다. 서두가 길었다. 그 의미의 경계를 바라보는 한 평론가의 글을 상찬한다는 것이 사족이 되어버렸다.

신형철은 ‘사건’의 의미를 소중히 여기는 평론가다. 1976년에 태어나 2005년 봄에 문학평론가가 되었고, 2007년 서른이 조금 넘은 나이에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이 되었고, 2008년에 첫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를 펴냈고, 2011년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를 묶었다. “정치적 올바름을 바탕으로 핵심을 놓치지 않는 미문으로 고(故) 김현과 비교할 법하다”(최재봉)와 같은 평가가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 시간이었다. 시의 경지에 다다른 그의 평론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사건’을 느끼게 한다. ‘느낌의 공동체’라는 제목이 허술하지 않은 이유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문학의 자취를 자신만의 느낌으로 옮긴 그의 글은 시와 산문, 평론의 경계를 무람없이 오간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혹은 자신에게 주어진 문학이라는 경전에 신령과 진정을 다해 예배한다. 강정의 무지막지한 탐미주의와 무모한 낭만주의는 변종과 변성의 언어로, 생살의 실재를 현시하는 김민정의 시는 미친년 널뛰는 듯한 직유의 언어로, 우울한 내상의 날들의 결핍을 노래하는 김선우의 시는 충만하게 피어나는 꽃으로, 버티고 버텨서 슬픔이 투명해진 이병률의 시는 아름다움을 넘어 엄결(嚴潔)함을 찾아내는 식이다.

여기에서 그친다면 세상에 뿌려진 저 책들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사방이 온통 미문으로 그득한 그의 글은 가장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가장 그다운 글이어서 좋다. 그는 마치 이 땅의 문인들의 삶을 이미 다 겪어낸 것처럼 말을 짓는다. 낮과 밤과 새벽에 읽고 쓴 자신의 글이 모두 그들에게서 얻어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몰락의 에티카』에서든, 『느낌의 공동체』에서든 그는 감각의 문과 사유의 문을 열고 닫는 일을 잊지 않는다. 김연수를 도서관으로 김중혁은 박물관으로 문태준을 마을회관으로 비유한 유머와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에서 시를 찾아낸 예리함이 어색하지 않게 교호한다. 희망을 말하는 무책임한 낭만적 서정 대신 제도와 인간과 예술의 동시다발적 혁명을 꿈꾸는 ‘가망 없는 희망’을 선언하는 대목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시나 소설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불투명한 아름다움이 그의 글을 통해 삶으로 확장됨으로써 우리는 문학에 여전히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게 『느낌의 공동체』는 목적 없이 떠난 여행길에서 간신히 찾아낸 우물 같은 책이다. 그가 길어 올린 우물물로 목을 축인 덕에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비록 그 물을 마실 때마다 좌절과 시샘이라는 갈증을 참을 수 없었지만, 그래서 적잖이 고통스러웠지만 무시로 그가 파놓은 우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신형철은 책 어딘가에서 자신은 늘 지는 싸움을 하는 존재라고 적었다. 아니다. 당신이 틀렸다. “읽고 쓰는 것이 삶의 거의 전부”인 당신 앞에서 내(우리)가 패배했다. 상대가 당신이라면 기꺼이 백전백패할 수 있으니 걱정 마시라. 몰락하는 자는 매혹적이니까, 우리는 느낌의 공동체이니까. 마지막으로 한마디. 세번째 평론집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소식이 없다. 평론가는 글만 생각하지 말고 기다리는 독자 생각도 해야 한다.

윤동희 | 북노마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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