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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유희와 고통, 그 무상의 이미지

전시를 본다는 것은 빼어난 재미는 없지만 아름다운 일이다. 컨템퍼러리 공간을 미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 묵묵히 채운다. SNS로 갈 곳을 선택한 사람들이 공간을 찾고 다시 SNS로 인증한다. 언제부턴가 미술이라는 해시태그가 SNS를 수놓고 있다. 그곳에서 미술은 ‘so hot’하다. 그러나 미술로 일상의 소임을 다한 사람들은 모른다. 미술을 한다는 것이 철저히 육체적 일임을 알지 못한다. ‘미술의 일’은 인식과 감각과 육체의 노동이다. 세상은 미술가에게 단단한 하드웨어와 유연한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요구한다. 아름다움이란 그런 것이라고 정의 내린다. 세상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어서 작가는 자신과 세상을 착상시켜(concept) 인력으로 가능한 최신 감각을 생산한다. 그 육체의 극치, 감각의 극치가 동시대 미술이라는 콘셉트로 유통된다.

지금 나는 한 명의 작가를 위해 글을 쓴다. 지희킴은 앞으로 나가기 위해 붓을 내려놓지 않는 미술가 중 하나다. 내가 문장의 인연으로 작가를 만났다고 해서 특별히 응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 글이 전시에 극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전시라는 행위에 점수가 있어서 이 글이 다른 전시보다 몇 점을 더 얻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열정적으로 임하겠지만 애석하게도 전시는 그런 승부가 아니다. 그저 살아가며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점유한 작가의 일시적인 행위를 바라볼 뿐이다. 그러고 보면 예술이란 실효성이 떨어지는 행위다. 이 전시를 잘 마친다고 해서 작가의 다음 행로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술가의 성공은 전시와 전시 사이의 ‘공백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미술가의 공백이 휴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술가의 고독이란 결코 붓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시대가 무시간성․무공간성으로 뒤숭숭해도, 나의 정체를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 서러워도 고독한 붓질을 멈출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여기 있다고 소리 높이는 건 격이 떨어지는 일이다. 이러니저러니 고독할 수밖에, 그러니 그저 그릴 수밖에. 전시와 공백기의 적절한 밸런스를 지키는 일, 유명과 무명 사이를 철저히 감수하는 일. 그것이 미술가의 본분이요 세상을 견디는 가장 심플한 방식이다.

물론 아무런 목적 없이 그리기만 해서는 더욱 실효성이 떨어진다. 미술을 하는 자에게 동시대 회화의 양상을 고민하는 일은 필수 덕목이다. 그것은 회화를 어떻게 경험하는가를 되묻는 일이다. 다행히 지희킴의 그림은 회화의 동시대성을 보여주는 유효한 리트머스다. 작가는 회화를 바탕으로 자신의 조형언어를 안정적으로 쌓아올렸다. 그 안정성은 막대한 작업량에서 나온다. 수년에 걸쳐 집적된 ‘시리얼(serial)’적인 작업을 살피다 보면 작가의 작은 몸에 내재된 막대한 이미지가 궁금해진다. 작가의 붓이 머물고 떠나는 곳마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우글거리고 세련된 그래픽 이미지가 증식한다. 어떤 기승전결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작가의 욕망으로부터 꿈틀꿈틀 분출된 이미지의 증식. 그것이 지희킴의 그래픽 풍경의 미덕이다.

사건의 철학과 신체의 철학, 그 수행성

지희킴의 회화성은 구축과 해체의 양상을 동시에 띤다. 대체로 구축과 해체는 작가의 심리적 정황을 반영한 경우가 많은데, 지희킴 역시 개인의 생활의 감각을 작품의 지지대로 삼은 듯하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작업이 캔버스 표면에 물감을 바르고 긁어내기를 반복하여 작가의 신경증적인 동기를 숨기지 않는데 반해, 지희킴은 ‘팬톤(pantone)’ 컬러의 ‘플랫(flat)’한 조형을 매끄럽게 구사하여 차별화한다. 이른바 ‘그래픽 회화’다. 그러나 나는 지희킴의 회화를 ‘그래픽 그라피티(graphic graffiti)’로 부르고자 한다. 최근 주목할 만한 작가들이 회화성을 강조하려고 캔버스뿐만 아니라 나무 패널을 지지대로 삼고,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른 물감을 덧바르거나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여 화면의 두께를 쌓아가지만 지희킴은 광대한 화면으로 승부를 건다. 그의 화면은 여느 작가의 그것보다도 크고 넓고 평평하다. 그의 시야는 화면이 아닌 작품이 놓이는 공간 전체에 맞닿아 있다. 벽화에 가까운 드넓게 펼쳐진 화면, 그 사이를 뚫듯이 가로지르는 선과 색채, 그리고 독립 서점에 놓여도 손색없는 전시 출판물. 지희킴은 그래픽디자인 속성이 깊이 배어 있는 벽화 풍경에 집착하고, 그것의 전과 후를 아우르는 ‘프로덕션’을 세련되게 실천하는 작가다.

작가는 절개된 이미지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론 이야기라는 단어는 조심스럽다. 거대한 이야기에서 작은 이야기로, 급기야 이야기의 효용이 사라진 시대에 이야기라니! 그러니 풍경이라는 말로 대체하자. 작가는 탈구되고 절단된 파편으로 풍경을 구성한다.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그 이미지는 작가가 간절히 희구하는 어떤 ‘욕망’이 아닐까 싶다. 지희킴은 잘라진 풍경과 연결된 다른 이미지를 찾아 헤맨다. 그의 절단된 이미지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자학적 행위에 빠지지 않고 당당하게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동시대적 팬톤 컬러로 자유롭게 구성된 이미지는 ‘동경’의 대상을 향해 움직이되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는다. 결핍으로부터 생겨났으되 그 결핍 안에 머물지 않는 생명력. 관객들은 그 이미지의 통로에서 자신의 욕망을 점검한다. 욕망을 기준으로 동경의 대상과 연민의 대상을 확인한다. 어떤 이미지는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자신을 떠올리게 하고, 어떤 이미지는 자신이 내동댕이쳐야 할 끈적끈적한 현실을 상기시킨다. 지희킴의 회화의 하이라이트는 이 순간 태동한다. 그의 회화는 현실과 판타지, 정형과 비정형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세속의 끈적끈적함을 무화시킨다. 무상(無常)! 일본의 불교 사상가 마이다 슈이치에 따르면 무상은 ‘아니카(anicca)’라고 한다. 인도-유럽계 언어에 속하는 팔리어 ‘니카(nicca, 常)’에 반대말이 되는 접두사 ‘아(a)’를 붙인 것이다. 그런데 ‘니카’라는 말이 재미있다. 일본어 네카네카(끈적끈적)를 연상시키는 이 말은 뭔가 단단하게 들러붙거나 고정된 것을 말한다. ‘니카(고정되어 있음)’에 ‘아’를 붙여서 ‘아니카’가 된 것이다. 결국 무상은 끈적끈적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는 것이다. 그 변화 속에서 존재의 상태를 직시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희킴의 그래픽 이미지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정된 것,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 그래서 변할 수밖에 없음을 설파한다.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 그 변화는 운동이다. 우리는 ‘나[我]’이자 동시에 ‘내’가 아니다. 나는 온갖 사물의 근원에 있으면서 개체를 지배하고 통일하는 독립 영원의 주체이자 끝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객체다. 세월의 흐름에 굴복하는 신체가 증거다. 지금 우리 몸은 수십만 개의 세포가 죽고 그만큼의 새로운 세포가 태어난 결과물이다. 그건 마음도 어찌할 수 없어서 우리의 감정과 정신도 변화한다. 허무하다. 그러나 깊고 심오한 가르침은 허무하거나 덧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변화하는 존재의 실상을 깨닫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라고 권면한다. 실로 무상한 모든 행(行)을 깨닫고 열심히 ‘수행’해야 하는 이유다. 그게 아닐까. 지희킴이 작업실을 떠나지 않는 까닭은, 그가 붓을 놓지 않는 이유는. 지극히 세련된 화면의 그래픽 이미지는 실은 신체적 철학에 버금가는 그리기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지희킴의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수행의 태도로 일시정지(pause)하는 것도 좋겠다. 현실과 동떨어진 한낱 만들어진 이미지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남길 것과 버릴 것을 분명하게 하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매 순간 변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할 것이다. 좋은 일이다. 그것이 미술을 제대로 감상했을 때 일어나는 일이니까 말이다.

다양한 선과 색이 만들어내는 이미지 계(系). 지희킴의 이미지는 서로를 탐하면서 화면을 구축하는 재료가 되고 하나의 매체를 이룬다. 어떤 이미지는 덩어리가 되어 감상자의 인식과 감각을 오가고, 어떤 이미지는 인식과 감각 자체를 허물어뜨린다. 이미지의 강렬한 움직임은 급기야 표면을 붕괴시켜 작가의 내면의 심층을 겉으로 드러내고, 언어가 실조(失調)되는 상황 혹은 언어가 성립하기 이전의 상황으로 귀결된다. 분열증! 그의 그림 앞에서 어떤 통일된 언어를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다. 별 수 없다. 무상이다! 이미지의 파동 앞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도 괜찮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아무 이야기도 소용없는 시대에 스토리텔링을 자각하는 것은 ‘올드’하다. 때마침 우리는 내부에 확고한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미지를 만나게 되지 않았는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장르가 된 이미지, 그러나 해독 불가한 시스템. 지희킴의 그림은 세상과 별개로 운용하는 이미지,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이미지는 탄생과 소멸, 아우라와 복제, 숭고함과 가벼움을 동시에 품고 내뱉는다. 양가적 가치가 교차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위해 지희킴은 주저 없이 그리고 또 그린다. 이유는 하나. 그리고 싶어서! 이 얼마나 심플한 단어인가. 그린다는 행위는 얼마나 생동감 넘치는가. 그린다는 업보는 얼마나 본능적인가. 바실리 칸딘스키가 회화적 요소를 분석하기 위해 점-선-면에 대한 이론을 체계화시킨 게 정확히 93년 전이다.

“예술작품은 의식의 표면에서 반영된다. 예술작품은 피안에 놓여 있으며, 자극이 다하고 나면 의식의 표면으로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역시 예술의 경우에도 직접적이며 내적인 유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유의 투명하면서도 견고하고 두꺼운 유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작품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모든 감각을 통해 살아 숨 쉬는 그 고통을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다.”

- 『점․선․면-회화적인 요소의 분석을 위하여』(1926), 바실리 칸딘스키 지음, 차봉희 옮김, 열화당, 2019, 13쪽


이 문장은 지희킴의 이미지 그 자체이지 않는가?

윤동희 / 영상커뮤니케이션, 북노마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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