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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
● ESSAY 인생은 SNS로 흐르지 않는다 인간 자아의 가장 핵심적인 활동은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를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에는 알렉산드라 오카시오-코르테즈라는 정치인이 있다. 당연히 만난 적은 없다. 내 주제에 누구를……. 그래도 보고 듣는 일 정도는 하기에 최소한의 ‘인포(info)’는 알고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기금 모금 행사에 ‘부자에게 세금을’이 적힌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민주당 의원, 1980년대 초기부터 1990년대 중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줌(Zoom)을 통해 교육받은 줌머(Zoomer)를 대표하는 좌파 밀레니얼. 오카시오-코르테즈는 어른이 주도하는 풍진 세상에 부와 권력의 재분배를 요구하는 청년의 상징이다. 당신도 기억해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헌신할 사람이니까. 밀레니얼, 청년, 부, 권력, 세금, 환경…… 오카시오-코르테즈에 따라붙는 연관 검색어는 삶의 절대적 플랫폼이 자본주의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경제학자 우석훈은 『슬기로운 좌파생활』에서 “자본주의라는 현실이 작동하는 한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이 중요한 1번 질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본주의를 예찬하건 혹은 비판하건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리라..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부와 행운을 끌어당기는 힘(Having)을 기원하고, 인간을 가둔 돈-시간-정신의 울타리를 자르는 ‘역행자’로 살라는 ‘인생 주술서’를 신봉하는가, 아니면 ‘영끌’해서라도 ‘부의 추월차선’에 올라타고 싶은가…… 적고 나니 참 어수선하다. 다행일까. 오카시오-코르테즈로 상징되는 지구촌 밀레니얼이 바라보는 자본주의는 다른 것 같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퇴직금 50억 원을 수령한 국회의원 아들보다 자기 능력으로 ‘플렉스’하는 셀럽에게 박수를 보내는 세대, 권력으로 이익을 강탈하는 힘 센 자보다 지구를 염려하는 억만장자를 존경하는 세대, 기본소득과 부자 증세에 무심한 정치인을 단호하게 ‘패스’하는 세대, 경제가 작동하는 법을 파악하여 어른의 공식을 벗어나려는 세대…… 더디지만 ‘그들’의 시대가 오고 있다. 물론 어른들이 순순히 자리를 내어줄 리 없다. 그들이 누구인가. 아파트 놀이터를 썼다는 이유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들에게 ‘도둑놈’ 딱지를 붙이는 자들이 아니던가. 아직까지는 그들의 전략이 먹히는 듯하다. 어른의 전략은 무엇일까. 돈? 권력? 아니다. 그들도 진화한다. 이제 그들은 ‘문화’를 활용한다. 자존감(self-esteem). ‘우리 아이에게만큼은’이라는 핑계로 자존감을 선물하는 부모, 그런 부모 아래에서 마음먹는 대로 될 수 있다고 믿는 아이. 여기에 게임과 아이돌(엔터테인먼트)과(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장착되어 승자가 독식하는 신자유주의에 적합한 인간이 양산된다. 그사이, 서초구 초등학교 교사가 고통 받았다. 이 땅의 ‘선생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누구도 살피지 않았다. 실업, 교육 실패, 아동 학대, 가정 폭력, 노숙자…… 시대와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는 모조리 ‘낮은 자존감’ 탓으로 뭉개질 뿐이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자존감을 ‘조작’하는 어른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나’는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좀처럼 바뀌지 않는 존재구나…… ‘자존감 세대’로 양육된 아이가 청년이 되어 현실을 절감한다면? 폭력, 우울, 공황장애, 자해, 자살의 원인이 내가 아닌 어른에게 있음을 깨닫는다면? 어휴, 말하지 않으련다. *** CJ라는 밀레니얼이 있다. 빵과 커피를 팔고, 예능과 드라마를 만드는 대기업은 아니다.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윌 스토(Will Storr)가 488쪽이라는 만만치 않은 분량으로 탈고한 『셀피』의 주인공이다. 셀피(selfie)는 셀카로 찍은 사진을 곳곳에 올리는 행위를 말한다. ‘나는 소중해’라는 소리 없는 외침이 들려오고, ‘보정’으로 만들어낸 비현실적 이미지가 어른거린다. 현실보다 SNS에 목을 매는 ‘셀피 중독자’로 살아가는 CJ는 수십만 장의 셀카를 보관하려고 저장 공간(cloud) 이용료를 내고, 사진을 보정하느라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된다’고 믿는 밀레니얼의 극한 나르시시즘. CJ는 완벽한 나를 상상하고 연출하는 ‘자존감 중독자’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 자존감의 원뜻은 나무랄 데 없다. 우리가 갈구하는 자존감이 내 안의 성숙한 사고와 가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인정이나 칭찬에 의해 얻어진다는 점이 문제일 뿐이다. SNS에 들러붙은 ‘좋아요’로 존재감을 확인하는 사람들. 그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자존감이 아닌 타존감(他尊感)을 갈구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민망하다. 자존감은 ‘평판’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소문’에 민감해진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던 시절은 그나마 나았다. 속도가 느렸으니까, 파급력도 약했으니까. 지금은 아니다. 나보다 완벽한 삶을 꾸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확인하는 속도가 빨라졌고 지경도 넓어졌다. 인스타그램도 해야 하고 스레드도 해야 한다. 모두, 힘들어졌다. 과거의 영웅은 신화와 역사와 전쟁과 정치와 경제와 미디어에 존재했다. 지금은 엔터테인먼트와 SNS와 게임에 흩어져 있다. SNS에서 평판을 획득하면 누구나 ‘부자’가(오늘날 영웅은 부자가 아니던가) 된다고 믿는 우리에게 『셀피』는 말한다. - 우리는 영웅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이해하라. 분수에 맞는 목표를 추구하라. 영웅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사람들을 믿지 말라. 당연한 얘기지만 인생은 SNS로 파악할 수 없다. SNS는 ‘이렇게 살고 싶다’는 바람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SNS로 나를 호소하고, 어떤 사람은 타인을 두리번거린다. 다르지 않다. 타인에 대한 관심도, 타인을 향한 위로도 결국 나를 보여주고 증명하고 확인하는 수단이다. SNS를 하지 않아도 보통의 삶을 단단하게 유지하는 사람,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화양연화(花樣年華)’를 SNS로 꾸미지 않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다. 독일의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세상을 알라』에서 “철학자는 세계를 인식하지 않고 자기만의 특별한 주관적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자”라고 적었다. 세계를 과도하게 의식하지 않고 자기의 윤리적·미학적 입장을 가다듬는 삶의 태도에서 ‘자존감’의 참뜻을 되새긴다. 다른 사람의 ‘좋아요’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과제에 시간과 노력을 쏟으면 저절로 생겨나는 것. 자존감은 그런 것이다. 철학이 지적인 사유의 기술에 머물지 않고 현실에 유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프레히트의 철학 3부작은 다음으로 연결된다. 세상을 알라(고대와 중세 철학), 너 자신을 알라(르네상스부터 독일의 관념론까지), 너 자신이 되어라(현대 철학). 세상을 알고, 나를 알고, 결국 ‘I, me, my, mine’이 되는 길. 자존감은 SNS에 있지 않다. SNS ‘밖’에 있다. 세상에 있다. 윤동희 / 북노마드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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