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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작은 책

나는 특별할 것 없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1인출판사를 궁벽하게 운영하는 자이니 편집과 디자인을 말할 만한 식견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나에게도 눈이 있어서 책과 디자인의 세계를 살필 수는 있지만, 그 세계를 들여다보는 눈도 나날이 침침해져만 간다. 이런 내가 출판 현장에서 책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은 이들에게 무언가를 전한다는 게 참으로 불편하다. 그래도 내가 ‘노동’을 해서 살림을 꾸려가는 것은 책을 만드는 일이니 편집과 ‘북 디자인’에 대해 몇 자 적고자 한다.

그래픽디자이너 김영나 씨는 2005~06년을 기점으로 국내 그래픽디자인에 중대한 전환기가 있었다고 말한다. 2005년 4월에 출간된 《idea》라는 그래픽디자인 전문지에서 읽었다. 그때를 즈음해 대규모 에이전시들의 시대는 저물고 소규모 스튜디오들이 디자인 플랫폼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그는 적고 있다. 그 분기점에 나는 미술 기자(월간미술) 일을 끝내고 안그라픽스에서 책을 만들었다. 타이포그래피를 중심으로 그래픽디자인 책들을 만들며 디자인을 ‘공부’했던 시간이었다. 그 시기를 즈음해, 안그라픽스는 전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가이드북으로 불리는 ‘론리플래닛’과 계약을 맺고 여행서 분야에 뛰어들었다. 토니 휠러 부부가 시작한 론리플래닛 출판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여행서 출판사로, 지금은 수많은 여행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론리플래닛 한국판 출간과 아울러 안그라픽스는 ‘여행’을 주제로 한 책들을 디자인과 더불어 주력 도서로 삼았다. 김봉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의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2002년 4월 출간), 김개천 교수(국민대)의 『명묵의 건축』(2004년 12월 출간)처럼 전통문화와 여행을 결합시키고, 그래픽디자이너 박우혁의 『스위스 디자인 여행』(2005년 1월 출간), 그래픽디자이너이자 비주얼 자키로 활동하는 박훈규의 『박훈규 언더그라운드 여행기』(2005년 5월 출간), 디자인 듀오 ‘슬기와 민’의 『네덜란드 디자인 여행』(2008년 9월 출간) 등 디자이너의 여행에 주목했다. 여행 가이드북 중심이었던 여행서 시장에서 안그라픽스의 여행서는 시장 사이즈는 작지만 ‘다른’ 여행서로 회자되었다. 만 부 단위로 제작되는 가이드북이 아닌, 초판 2천 부만 넘기면 괜찮다고 여기는 ‘작은’ 책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2000년대 중반까지 계속해서 성장한 여행서 시장의 상황과 독자들에게 믿음을 안겨주는 확실한 저자들 덕분에 책은 그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같은 시기, ‘포토 에세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여행서가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시인 김민정이 기획, 편집하고 북 디자이너 한혜진이 디자인한 이병률 시인의 『끌림』(2005년 7월 랜덤하우스코리아 출간, 2010년 7월 개정판 달 출판사 출간)과 김경주 시인의 『패스포트』(2007년 8월 출간)는 제목, 차례, 구성, 글, 사진, 디자인 등 모든 면에서 달랐다. 당시 여행서는 항공사 기내지 등에 여행 칼럼을 게재하는 직업 사진가들의 그저 그런 감상문을 모아놓은 수준이었다. 직업 사진가들의 천편일률적인 글과 테크닉은 있되 기념사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사진으로 연명했던 여행서 속에서 시인의 글과 사진, 그리고 그것을 담백하게 처리한 한혜진의 디자인은 분명 새로웠다. 그리고 2007년, (주)문학동네에서 시행한 임프린트-계열사 제도를 통해 달(이병률, 2007년~), 북노마드(윤동희, 2007년~), 난다(김민정, 2011년~)라는 이름으로 이들은 하나의 가족이 되었고, 여행을 재료로 한 포토 에세이는 닮은 듯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이병률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2012년 7월 출간), 『내 옆에 있는 사람』(2015년 7월 출간)은 여행 에세이의 지존으로 자리 잡았다. 북노마드 역시 『삶은 여행』(이상은 지음, 2008년 3월 출간), 『가만히 거닐다』(전소연 지음, 2009년 1월 출간), 『소울 트립』(장연정 지음, 2009년 7월 출간), 『최강희, 사소한 아이의 소소한 행복』(최강희 지음, 2009년 9월 출간), 『눈물 대신, 여행』(장연정 지음, 2012년 4월 출간) 등으로 포토 에세이 시장에 하나의 구성 요소가 되었다.

포토 에세이로 상징되는 여행서는 감성을 자극하는 제목과 내러티브, 짧은 글과 담백한 사진 등 이른바 ‘달달한’ 디자인을 실험하기에 적합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창업한 작은 출판사들이 이 장르를 주력 도서로 삼는 경우가 많았고, 독자들 역시 위로와 치유라는 이름으로 이 책들을 소비했다. 2007년 출간된 우석훈 교수의 『88만원 세대』를 기점으로 현실에 절망하고 분노한 독자들이 한비야, 공지영, 박경철, 김난도, 안철수, 김미경, 혜민 스님, 강신주, 한병철, 박웅현, 강상중 등 살아 있는 자는 물론 공자, 노자 등 죽은 이들마저 멘토라는 이름으로 소환해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면, 그와는 조금 다른 질감을 원한 독자들이 포토 에세이를 통해 해결될 수 없는 힐링을 갈구하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그대로이다.

청춘을 타깃으로 삼은 시장에서 스타 저자 및 강사로 떠오른 저자들과 그들을 모시는 데 성공한 (대형) 출판사들이 명성과 돈을 거둬들인 데 반해 그 책들을 소비한 독자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포토 에세이 역시 장르-내용-저자-형식 등 자기복제를 무수히 반복하며 출판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왔다. 포토 에세이를 출판계에 도입하고 정착시킨 달-북노마드-난다 등이 2012년을 기점으로 해당 시장의 경계에서 또다른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북노마드 역시 『잔』(박세연 지음, 2012년 1월 출간), 『여행의 공간』(우라 가즈야 지음, 송수영 옮김, 2012년 3월 출간), 『제주도 비밀코스 여행』(최상희 지음, 2012년 6월 출간), 『수요일은 숲요일』(김수나 지음, 2012년 7월 출간) 등으로 포토 에세이 시장을 빠져 나왔다. 포토(그림) 에세이로 만들 수밖에 없는 아이템의 경우, 기획-진행 단계에서 책 크기(판형)를 과감하게 줄이는 방식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3시의 나』(아사오 하루밍 지음, 이수미 옮김, 2013년 2월 출간)와 『너도, 나처럼, 울고 있구나』(문나래 지음, 2013년 5월 출간) 등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여행 에세이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되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범람, 그로 인한 글의 함량 미달을 극복하기 위해 시인, 뮤지션, 영화감독 등을 필진으로 엄선한 여행무크지 『어떤 날』 시리즈는 여행에 대한 글이 가져다줄 수 있는 깊은 느낌을 담기 위해 고민한 결과다.

이렇듯 2000년대 이후 출판계가 주목한 편집과 디자인은 대부분 ‘작은’ 출판사에서, ‘작은’ 시장 사이즈에서, ‘작은’ 판형과 ‘작은’ 이야기로부터 나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에 반향을 일으키고, 시장을 선도하는 베스트셀러들이 제작비 손실을 고려한 기본 판형과 독자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제목, 구성, 문장, 편집, 디자인, 마케팅의 공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 반해, ‘작은’ 책들은 ‘예쁘다’ ‘이것도 책이 될 수 있구나’라는 반응과 갸웃거림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작은’ 책의 편집-디자인 실험은 『제안들』 시리즈로 존재감을 드러낸 워크룸 프레스 등 출판과 디자인을 유영하는 스튜디오형 출판과 유어마인드를 시작으로 곳곳에 생겨나고 있는 독립 책방을 수놓는 독립출판으로 옮겨가고 있다. 하나의 브랜드를 선정해 그들만의 방식으로 만들어 상업적 성공마저 거두고 있는 JOH의 《B》 시리즈, 그래픽디자인과 오타쿠 독자층을 정확히 간파한 프로파간다의 《GRAPHIC》 시리즈와 『연필 깎기의 정석』(데이비드 리스 지음, 정은주 옮김, 2013년 7월 출간) 등의 출판물, 잡지 《어라운드》 등도 ‘작은’ 책의 또다른 성공 사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사이 출판은 지속적으로 ‘작아지면서’ 거의 모든 책들이 ‘작은’ 시장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고 있다. 바야흐로 이제는 ‘작은’ 책의 시대가 된 것이다.

북노마드는 또다른 ‘작은’ 책을 펴내고 있다. 지금-여기 출판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은 독립출판의 상황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제대로 된 ‘작은’ 출판을 만들어나간 소수의 작가들과의 협업을 시도하려 한다. 그들이 갖는 고유한 자율성과 마이너리티적 의미를 지키되, 독립출판과 기성 출판 ‘사이’에 놓이는 책을 만들고자 한다. 디자인이 책을 넘어 출판사의 ‘정체성(identity)’을 가늠하는 리트머스가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디자인을 중심으로 시스템을 꾸리지 않는 출판사, 책을 만들어 파는 것도 모자라 커피와 빵까지 팔고 있는 출판사, 시류와 다른 문화 콘텐츠에 영합하거나 따라 가는 것을 ‘기획’으로 부르는 출판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작은’ 책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지은 로버트 M. 피어시그는 한국에서 성벽을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은 “노련한 지적 기획 때문도, 작업에 대한 과학적 관리 때문도 아니라 그 성벽을 쌓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 대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독특한 방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좋은 책은 기획과 관리를 넘어 그것을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을 소유한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만약 좋은 편집과 북 디자인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어떤 스킬로 이루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을 소유한 사람들이 행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언론 기사에 따르면, 제임스 다이슨(Dyson) 다이슨사 창업주는 최고경영자(CEO)라는 직함을 벗어던지고 수석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날개 없는 선풍기’와 ‘먼지 봉투 없는 진공청소기’ 등을 개발해 억만장자의 반열에 오른 그이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연구실에서 신제품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그저 제대로 움직이는 기계(machine)를 만들고 싶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아름답게 포장된 제품(product)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좀더 좋은 성능을 가진 가전제품을 만드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기 때문이었다. 다이슨은 이렇게 말한다. “포장과 눈속임(gimmick)에 불과한 마케팅과 브랜딩은 필요 없다”고. 마케팅에 기반을 두고 성장한 회사는 결코 롱런할 수 없다고 그는 재차 강조한다. 그는 마케팅을 버리고 R&D(연구 개발)에 집중하는 것을 선택했다. 지속적인 판매는 결국 물건의 유용한 기능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렇기에 R&D만이 유일한 장기적인 성공 전략이라는 그의 말은 출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다이슨은 ‘제품’이 아닌 ‘기계’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제품이라는 단어에는 상업적인 의미가 짙기 때문이다. 소비자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가운데, ‘어떻게 해야 팔릴까’보다는 ‘어떻게 해야 기능을 개선할까’라는 생각을 먼저 하는 모습은 좋은 편집-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삼기에 충분해보인다. ‘제품은 제대로 작동할 때 가장 아름답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다이슨이 늘 마음에 새긴다는 문장처럼 외형적인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편집-디자인이 아닌, 책의 성능에 집중하는 편집과 디자인이 많아져야 한다. 그것이 속도와 규모의 시대에 책을 만들고 미술을 배회하는 자의 단독한 운명일 것이다.

윤동희 | 북노마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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