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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미술과 건축, 그 통섭의 만남

흔히 건축은 지식과 비지식 사이의 경계에 자리한 예술로 불린다. 건축가의 이상이라는 유혹과 현실 세계의 합의 사이의 고민과 갈등이 중첩된 까닭이다. 건축은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지녀서, 특유의 기준과 합목적성, 용도, 양식, 방식을 고민하기 마련이다. 건축가의 목적이 부합되는 범위에서 혹은 그 목적을 넘어서는 미지의 세계를 꿈꾸는 일. 건축이 우리에게 유의미한 까닭은 그것의 물질적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표현하는 정신적 세계에 있다. 건축은 이처럼 고유의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란 얄궂어서 건축의 특질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예민하게 구는 경우가 많다. 19세기 작고 육중하며 견고하면서도 투박한 로마네스크(영국에서는 노르만 양식으로 불린) 양식으로 성스러운 수도원 건물이 지어졌을 때, 건축이 맞닥뜨린 건 탐욕과 속임수와 사악한 기만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비판이었다.

미술과 건축의 대면이 이루어지는 공간인 미술관을 둘러싼 갈등도 빼놓을 수 없다. 미술기자를 거쳐 편집자로 살아가는 밥벌이의 특성상 미술가들과 건축가들을 골고루 만나는데, 그때마다 상대방을 향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걸 보게 된다. 이름 하여 미술관 건축의 딜레마인 셈이다.

미술과 건축의 관계는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가와 건물의 연대기적 구성은 미술사에서 쓰이는 전통적 범주와 스타일을 기준으로 삼는다. 개인의 안식과 안락함에서 출발한 건축이 지구촌 곳곳의 문화와 기후, 종교, 정치, 경제 제도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질 때마다 미술사는 그것을 기록해왔다. 이를 통해 건축은 종교적, 정치적 헤게모니의 상징으로 또는 당대 과학기술의 이정표로 기억되었다.

사실 모든 건축은 그것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문화의 소산이다. 그건 미술관도 마찬가지여서 대문자 ‘A’로 시작하는 ‘미술’에 걸맞은 독창성을 구현한 건축물이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다. 하지만 미술 현장에서 전시를 설계하고 행하는 큐레이터와 작가들의 생각은 다소 다른 듯하다. 그들에게 미술관이란 작품을 돋보이게 해야 할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공간이다. 작가주의로 공간을 통제하려 드는 건축가의 의도를 ‘오버’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물론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의 원칙처럼, 사람들이 제어하지 못하는 것, 숙명적인 것, 자발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것 사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건축의 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술인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가들이 원하는 건축은 건축의 보이는 부분보다 작품을 제대로 보여주는, 나아가 미술가조차 알지 못했던 작품의 속내를 드러내는 ‘기능’에 있다.

미술가들은 말한다.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라는 정언을 남긴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9)가 설계한 베를린의 신국립갤러리를 보라고. 공학과 건축의 조화로 유명한 이곳은 사방을 투명 유리벽으로 둘러싸고 지붕은 기둥에 의해서 지지되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인다. 건축가의 개성을 숨기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밝고 통풍이 잘된 널찍한 1층 공간과 폐쇄되고 격리된 비밀스런 지하 정원을 상충시켜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곳을 찾을 미술가들의 감수성을 배려하는 미덕을 잊지 않았다. 미술가들은 말한다. 살아 있는 3대 건축가의 손길을 거친 삼성미술관 리움, 렘 쿨하스라는 이름만으로도 화제를 모은 서울대 미술관,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밟고 싶은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등 이 땅을 대표하는 미술관들을 보라고. 거대한 규모에 비해 공간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낮은 천장과 유리 창문 때문에 작품을 저어하지 않느냐고 볼멘소리를 내놓는다. 해외라고 다를 게 없다. 전면이 유리로 이루어진 파리 까르띠에 재단 미술관과 뉴욕과 런던을 상징하는 모마와 테이트모던도 찬반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을 안온하게 지키고자 하는 미술가들의 바람과 화이트 큐브의 정형성을 깨고 싶은 건축가의 욕망은 이처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건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미술관 건축에서 중요한 건 건축의 ‘겉’이 아니라 ‘속’이라는 것이다. 전통을 거부하고(분리파), 빠름을 예찬하고(미래파), 콘크리트와 유리를 근간으로 삼고(독일공작연맹), 공업 생산의 아이디어를 수용하고(러시아 구성주의), 여러 가지 관점으로 건축의 시점을 재구성하고(데 스테일 운동), 자연스러운 기하학을 더하고(표현주의), 그 기하학을 다시 쇠퇴시키고(유기적 건축), 기능주의를 강조하고(영국 모더니즘), 덩어리가 아닌 공간과 평면에 중점을 두고(국제주의), 다양한 볼륨감을 연출하고(아르데코), 건축의 속을 드러내고(야수주의), 유연성 있는 질서를 창출하고(구조주의), 질서와 진실, 이성으로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신합리주의), 적은 것은 지루하다고 일갈하고(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앞서가고(하이테크), 재료의 감각적 특성에 주목하고(감각적 건축),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미니멀리즘), 산산조각 난 건축으로 건축의 한계에 도전하는(해체주의) 등 지난 100년간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달려온 건축에 미술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그건 바로 스타일과 세상을 재구성하는 탁월한 능력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조응해주는 ‘친절한’ 마음이었다.

그런 점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1956년에 완성한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의 사례는 곱씹어볼 만하다. 미술관의 표현적 양태가 내부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건축, 거꾸로 뒤집어진 달팽이 모양의 비탈길이 개방형 중정의 둘레를 감싸는 탁월한 공간감, 연속으로 이어진 경사진 바닥과 곡선으로 휘어 있는 수직 벽을 따라 걸으며 자연스럽게 작품과 조우할 수 있는 동선은 미술관 건축의 모범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정적인 공간으로 인식된 미술관의 적요함을 깨지 않되, 관람객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함으로써 그 공간의 미감(美感)을 몸으로 체득하게 했다.

그래서다. 건축을 바라보는 미술가의 시선도 조금은 달라져야 한다. 무언가를 인공적으로 짓겠다는 발상, 즉 자연을 극복하고 문명을 건설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밖에 없는 건축은 시작부터 지는 싸움을 해야 하는 불리한 입장이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건축가 김원이 『우리 시대 건축 이야기』에서 토로한 것처럼, 인간이 만든 음악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깊은 계곡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나 밤에 우는 소쩍새 소리의 감동을 그 깊이나 정도에서 능가하지 못하는 법이다. 건축가들이 꿈꾸는 최고의 건축이 최대한으로 자연을 받아들이고 이용하는 환경, 인간의 손길을 최소한으로 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은 건축의 생래적 비극을 잘 말해준다. 지금 미술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장소가 달라지면 사람도 달라진다’는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자신의 작업을 건축이라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놓고 고심하는 성숙한 자세일지도 모른다. 공간을 바라보는 미술가의 시선이 열리는 순간, 자신의 작품 너머 보이지 않는 공간의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건축은 한 편의 드라마다. 건축의 목적지가 미술관이든 혹은 작고 소박한 한 개인의 공간이든 건축이 개입하는 순간 한 편의 드라마가 생겨나는 걸 우리는 경험한다. 건축가의 선한 의지가 미술가의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시켜주는 ‘진심’을 담은 드라마를 자주 보았으면 좋겠다. 미술관이란 한 번 지어지면 적지 않은 시간을 같은 모양으로 영속해야 한다. 그 고정되고 정형화된 공간에서 각양각색의 예술 작품이 들락거린다. 이런 분명한 기준 앞에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이전의 주장과 ‘삶의 복잡한 모순을 반영해야 한다’는 이후의 생각은 무의미하다. 예로부터 미술과 건축을 넘어 인간을 행복하게 한 건축은 재료나 형태, 색채, 기능이 아닌, 그것이 갖는 고유의 분위기에서 나왔다. 건축의 눈을 과신하지 않기, 미술의 눈을 과도하게 주장하지 않기, 시간과 작은 공간에 큰 생각을 담기, 미술가들과 건축가들이 집중해야 할 공통분모는 여기에 있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좋은 미술이란, 좋은 건축이란 결국 ‘인간적 관점’에서 출발했다는 평범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시대다. 인간이 거둔 최상의 기술적 성과를 적시에 반영하는 게 성공의 원칙으로 여겨지는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건축과 미술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고민한다면, 지금-여기의 결과물이 과거의 그것에 비해 낫다고 단언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1920년대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립한 ‘바우하우스(1919~1933)’에서 교장을 역임한 건축가 한스 마이어(1889~1954)는 ‘사치의 필요가 아닌 사람들의 필요’에 의한 예술을 강조했다. 미술, 건축, 디자인, 공예 등 예술적 창조성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예술 훈련을 재결합시켜서 새로운 건축을 만들어낸 그때의 성과가 지금의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건축과 미술의 공통분모는 바우하우스 같은 교육의 혁신이 선행되어야 가능할지 모른다. 특정 장르의 예술가들이 주도하는 스튜디오나 작업실을 벗어나 세대와 장르를 초월한 예술가들이 색과 형태, 재료를 함께 고민하는 교육, 훗날 건축가와 미술가로 살아갈 젊은 예술가들이 ‘통섭’의 미학을 함께 실천하는 그런 교육. 21세기가 간절히 요구하는 미학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나지 않을까.

 글. 윤동희 | 북노마드+북노마드 미술학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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